서재필은 개화파 지식인으로 1884년에 박영효,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한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서재필 앞에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졌다.

그는 가구상회에서 일을 하는 동안 교회에서 영어를 배웠고, 워싱턴에 있는 미 육군도서관에서 동양서적을 관리하는 사서가 됐다. 동양인 최초로 미국의 공무원이 된 것. 그리고 조지워싱턴 의과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으며, 미국인과 결혼해 현지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당시 조선 상황이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개화지식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서재필은 11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가 가장 시급하게 여겼던 것은 계몽과 개화였다. 그래서 조정의 지원을 받아 신문사를 설립한 게 <독립신문>이다. 고종은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해 생활을 보장하는 한편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를 냈는데, 민간인이 창간해 구독료와 광고료 수입으로 신문을 운영한 것으로는 최초였다. 창간 당시에는 격일간으로 주 3회(화·목·토요일) 발행되었다. 신문은 한글을 전용하고 띄어쓰기를 단행했는데, 이는 당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지식인들 사이에 한글을 경시하는 풍토가 만연했고 한글 띄어쓰기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인데, 국민 모두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내린 결단이었다.

서재필은 신문 발행 외에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 개최를 주도했으며, 중국에 대한 사대를 척결하기 위해 독립문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파들의 추방운동으로 인해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서재필이 떠난 후, 윤치호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 영국인 엠벌리 등이 맡아 신문을 운영하다가 1899년 9월 14일자를 끝으로 폐간됐다.

그리고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100년이 지나고 서귀포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지역의 젊은이들이 지역의 여론형성과 문화 창달을 위해 언론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으고 <서귀포신문>을 창간했다. 1996년 봄의 일이다.

<독립신문>이 중국으로부터의 사대를 척결하고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만든 언론인데 <서귀포신문>은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가치로 여긴다. 그리고 독립을 위한 몸부림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전국 대부분 지역신문이 건설회사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도 <서귀포신문>은 여전히 주주 중심으로 독립적 운영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23년을 버텼다. 모든 게 독자와 시민들의 질타와 격려 덕분이다. 창간 23주년을 맞으며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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