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송주연 서귀포가정행복상담소 소장

어린 고사리. 몸을 낮춰야 보인다. (사진은 장태욱 기자)

중문으로 이사 오고 나서 드디어 20여 일만에 버티컬블라인드와 커튼으로 집 정리를 마무리하고 나니 제법 아늑한 느낌과 함께 포만감이 한껏 밀려드는 토요일 오후입니다. 선약이 되어있는 컨벤션센터에서 하우징페어를 한 바퀴 둘러보고선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제주의 봄을 만끽하기 위해 아는 선배 언니와 함께 제주시를 다녀오는 드라이브를 하기로 하고선 1100도로인지 아님 5·16도로인지 고민할 것도 없이 숲터널이 제법 그럴싸한 5·16으로 향했습니다. 누구는 1100도로의 롤링감이 좋다하지만 제주는 뭐니 뭐니 해도 5·16도로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낙엽마저 다 떨구어 낸 나무들이 처연한 모습으로 앙상한 가지만으로도 이렇게 예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까요.

아아, 봄은 봄인가 봅니다. 연초록의 새잎을 피워 올리는 숲 속 어딘가에 노루며 청설모며 고라니도 숨어서 숨 가쁘게 질주하는 우릴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람쥐는 도토리의 97%를 어디에 저장한 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숲 속엔 봄 되면 싹 틔어 올리는 참나무가 그리도 많다지요. 다람쥐의 기억력이 새삼 반가울 수가요. 왕벚나무도 꽃잎을 다 떨군 자리엔 초록의 첫걸음마가 시작되고 있었지요. 옅은 갈색의 나뭇가지 사이로 수채화인 듯, 가벼운 봄의 이파리가 연주하듯 제각각 잎을 밀어 올리는 숲 속엔 부지런한 초록의 교향곡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도 살랑거리고 천연의 향기가 열린 차창을 타고 넘어 들어오네요. 시각도 후각조차도 포만감으로 꽉 차오릅니다. 햇살은 부드럽다 못해 초여름의 그것처럼 후끈한데 기분조차 나른해집니다. 사려니는 숲길을 걷기엔 심심하다고 그냥 지나치고, 비자림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은 오후라 그냥 바다가 보이는 봉개동 어디쯤 걷기로 하고는 한화리조트 입구에 차를 세우고 산보를 시작하는데 앞서 가던 언니가 환호작약합니다. “고사리 많네!”하구요.

우리 둘은 의기투합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를 숙이고 둘레둘레 고사리를 눈으로 포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니야, 내 눈엔 고사리가 안 보여요.” 그 때마다 언니는 대답합니다. “몸을 낮추면 고사리가 보일게야, 몸을 낮춰, 몸을!” 아아, 하나 둘씩 고사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고사리앞치마 대신에 컨벤션에서 샀던 오천 원짜리 텃밭용 호미 쌌던 검정 비닐에 고사리를 꺾어 넣기 시작하면서 호흡은 가빠지고 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언제부터는 허리도 아프고 제법 무릎도 쑤시기 시작하네요. 제주에 와서 세 번째의 봄이 오기까지 고사리 따기는 올해가 처음입니다. 2017년도 4월에 국가태풍센터 근처 남원에서 고사리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나섰는데 고사리는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은 아이들처럼 술래인 나를 애타게 했지요. 정말이지 한 시간 동안 꼬박 헤매면서도 고사리 한 줄기도 꺾지 못한 채 낭패를 맛 본 첫 기억 탓인지 고사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오늘 토요일 오후에 휘뚜루 머리를 말아 올린 채 건초더미 속에, 메마른 말똥 속에, 찔레꽃 가시덤불 아래 “나 잡아봐라, 용용 죽겠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한두 줄기 꺾으려면 그 사이 언니는 열 가닥, 스무 가닥씩 낚아채 듯 고사리를 꺽어 풍성한 신부의 부케 마냥 손에 들고 검은 봉지를 든 제게 다가옵니다. “언니야, 내 눈엔 안 보인다.”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칭얼대면 언니는 또 대답합니다. “몸을 낮춰, 몸을! 그럼 보인다니까!”

그렇습니다. 어디 몸을 낮춰야 눈에 비로소 들어오는 것이 어디 고사리뿐만이겠습니까? 눈을 겸손하게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면 상대방의 안 보이던 것도, 애써 질끈 외면했던 이야기도, 사물의 실상도 비로소 눈으로, 가슴으로 비집고 들어오게 되어 있지요.

이제 4월이 다 지나갑니다. 71주년이 된 4·3도, 5년 전의 세월호도 모두 4월의 일입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아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픈 사연들을 몸을 조금 낮추면 제대로 보이고,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알게 됩니다. 당신은 너무 꼿꼿한 채로, 거기에 여전히 그대로 뻣뻣하게 서있지는 않으신가요?

몸을 낮추라니깐요. 고사리 따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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