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주옹기축제 굴할망제 26일 제주옹기박물관 노랑굴밧치에서 열려

굴할망제 사전공연. 문석범 소리꾼이 하나아트의 반주에 맞춰 옹기제작 과정을 사설로 풀고 있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2019 제주옹기축제가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제주옹기박물관 일대에서 열렸다. 노랑굴 불때기와 불할망제, 옹기 관련 체험 등 옹기를 주제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사)제주전통옹기전승보존회가 행사를 주관했다.

26일 굴할망제가 예정된 시간에 맞춰 옹기박물관 인근 노랑굴바치를 방문했다. 어린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그룻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다. 노랑굴밧치에서는 고달순 불대장과 청년들이 가마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고달순 불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는데, 3일째 잠을 못 잤다고 했다.

마침 남서풍이 강하게 불었다. 주민과 관광객은 바람이 불편한데, 불대장은 “바람이 밀어줘서 가마에 불이 잘 붙는다”고 반가운 기색이다. 100명 안팎의 주민과 관광객들이 박물관을 둘러보며 제주옹기의 매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마침 날씨도 좋아 노란 가마와 옹기가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날것 그대로의 제주자연이 멋을 한껏 드러냈다.

굴할망제.(사진은 장태욱 기자)
박물관 마당에 전시된 옹기들.(사진은 장태욱 기자)
어린이들이 옹기제작 체험에 나섰다.(사진은 장태욱 )

과거 제주옹기는 주로 대정읍과 한경면 일원에서 제작됐다. 이 일대 질흙이 옹기를 만드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이 세상에 나오기 전, 옹기는 주요 생필품이었다. 주민들은 마을별로 20~30명 단위의 굴계(옹기굴제)를 조직해서, 옹기굴을 관리했다. 계의 가장 큰 어른을 ‘황시’라고 했고, 황시 밑에 총무와 재무를 뒀다. 계원들은 돈을 모아 그 돈을 밑천삼아 옹기를 제작했다. 옹기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옹기를 거래처에 위탁하면, 물건을 맡은 사람은 옹기를 수레에 실어 마을별로 돌아다니며 팔았다. 옹기가 다 팔리고 나면 계원들은 수익금을 나눠 가졌다.

옹기를 생산하는데 장인 4명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들은 옹기를 생산해주고 그 댓가로 옹기나 수익금을 나눠 가졌다. 옹기를 만들어 팔면, 다시 옹기제작에 들어갔다. 보릿고개가 삶을 위협하던 시절, 농사만으로는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농민들은 옹기제작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부창래 도공장(우)과 이윤옥 질대장(좌)을 만나 과거 옹기굴제(굴계)와 옹기 생산과정 등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옹기 제작과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부창래 도공장은 “한 번은 내가 돈을 더 벌고 싶어서 옹기 한 가마를 샀다. 그리고 신례리 마을에 들러 옹기를 팔려고 짐을 내렸는데, 마침 집 주인이 동네에서 유명한 노름쟁이였다”고 말했다. 남의 마당을 빌려 옹기를 전시하고 지게에 옹기를 싣고 다니며 다 팔았지만, 화투판에 끼었다가 옹기 판매한 돈은 모두 날렸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플라스틱이 일상화됐다. 사람들은 값싼 플라스틱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옹기를 외면했다. 굴제(굴계)는 이후 하나 둘 해체되고 자취를 감췄다.

도공들은 예로부터 가마를 지키는 신이 있다고 믿었고, 그 신을 ‘굴할망’이라 불렀다. 굴할망에게 서운한 일이 없어야 사고도 없고, 가마에서 옹기도 제대도 구워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올리는 제사가 굴할망제다. 이윤옥 질대장, 김정근 굴대장, 부창래 도공장, 고달순 불대장 등이 노랑굴 앞에 상을 차리고 정성스레 제사를 올렸다.

굴할망제가 열리기 전, 사전 공연이 열렸다. 국악연희단 하나아트 단원 7명이 옹기제작과 관련한 민요공연을 선보였다. 문석범 선생이 ‘흙벽 바르는 소리’와 함께 사설을 들려줬다. 굴할망제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장단에 맞춰 허벅을 두드리며 난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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