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학의 선구자 나비박사 석주명(3) 비운의 천재

도내 모 박물관에 복원된 석주명 박사의 방(사진은 장태욱 기자)

석주명은 42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고, 학문 활동을 한 기간도 기껏해야 18년이다. 그렇지만 그는 학술논문 92편과 단행본 17권을 합쳐 총 109편의 논저를 남겼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양적으로도 방대하지만, 학술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재능과 의지와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 세 가지를 모두 가진 사람은 드물다. 석주명은 그 세 가지 조건이 다 구비된 사람이다. 그는 머리가 좋았고, 대단한 노력파였으며, 공부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집안 경제력이 있었다. 그는 천재성과 성실성을 겸비한 보기 드문 학자였다.

석주명은 일생을 나비와 제주도와 국제어(에스페란토)에 미쳐 살았다. 그는 뭔가에 빠지면 거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열정과 집중력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보통 학자들의 절반 정도의 짧은 생을 살았으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나비 75만 나비를 수집하고 20여만 마리를 정밀 관찰하여, 250여종으로 분류하고, 각 종마다 우리말 나비이름을 짓고 그 유래를 밝혔으며, 그 나비들이 어디에 분포하는지 우리나라와 세계지도에 한 장 한 장 분포도를 그렸다. 그가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숙박했던 곳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쪽 마라도까지, 동서로는 울릉도에서 소흑산도까지 우리나라에 그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석주명이 나비채집을 위해 여행했던 지도(빨간 점은 숙박지)

석주명은 서귀포에 살면서 제주도가 우리나라 언어와 문화의 뿌리가 남아있는 보물섬이라 보았다. 그는 우리말의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주어를 수집하여 우리나라 최초 방언사전인 ‘제주방언집’을 만들었다. 그의 천재성은 제주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는 당시 ‘조선어사전’을 갖다놓고 서귀포 호근리 출신 김남운과 애월면 출신 장주현을 불러다가 사전에 실린 표제어들을 제주말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물으면서 제주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였다.

석주명은 일본 학자들이 크기나 모양이 약간만 달라도 다른 종으로 분류하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개체들을 일일이 관찰하여 변이연구를 하였다. 그는 1936년에 발표된 ‘배추흰나비의 변이연구’라는 논문을 쓰기 위해 무려 배추흰나비 16만7천여 마리를 관찰하였고, 1937년 발표된 ‘굴뚝나비 변이연구’ 논문을 쓸 때도 굴뚝나비 3만4천여 마리의 앞날개 길이를 재고, 뱀눈무늬 수와 위치 등을 일일이 조사하였는데, 그것들을 관찰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계산하기조차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밤잠을 줄였고, 사람을 만나는 시간을 절약했으며, 식사하는 시간마저 아껴야 했다. 그의 연구실은 늘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친한 친구가 찾아와도 10분 이상 시간을 내줄 수가 없었고, 점심 대신에 땅콩으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그는 한국전쟁인 1950년 7월에도 서울에 사는 동생집 골방에서 담요로 커튼을 치고 ‘제주도수필’, ‘제주도곤충상’, ‘제주도자료집’, ‘한국산 접류의 연구’, ‘한국산 접류분포도’, ‘한국본위 세계박물학연표’ 등의 원고를 마무리하고, 인쇄 직전에 있던 책들을 교정하였다.

그러나 전시상황이라 그 책들의 출판은 지연되었고, 석주명은 1950년 10월 6일 불행한 삶을 마감하였다. 서울수복 과정에서 불타버린 국립과학박물관 재건 대책회의에 참여하러 가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래도 그가 제주도와 나비관련 자료들을 완벽하게 끝까지 정리해두었기에 훗날 유고집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윤용택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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