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 최부의 600여 년 전 중국 표착은 제주와 닝보가 최초로 만난 사건

닝보시
닝보시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482년(성종 13년)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이나 사헌부, 홍문관 등에서 봉직했다.

이후 1487년(성종 14년) 9월에 추세경차관(抽稅敬差官)으로 제주에 파견됐다. 그가 제주에서 한 일은 육지부에서 제주로 도망친 노비를 찾거나, 도내 목장에 있는 공노비와 사노비 등을 확인하고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1월에 부친상을 당해 나주로 돌아오던 중 거센 폭풍을 만났다. 다행히 그가 탄 배는 수정사의 승려가 타던 사선(私船)으로 관선보다 튼튼하고 속도도 빨랐다. 호송군 9명과 선원 20명 등을 포함해 44명이 몸을 싣고 있었는데, 이들은 14일 동안 풍랑과 사투를 벌인 끝에 절강성 영파부(寧波府에) 속한 대산섬(岱山島)에 표착했다.

이후 최부는 절강성의 도저소와 소흥부, 항주부 등을 거치면서 3차례에 걸처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외구가 아니라 표류민이며, 조선의 관리임을 드러냈다. 이에 운하를 따라 소주-서주-천진 등을 거쳐 중국 북경으로 보내졌고, 중국 예부와 병부가 정한 송환절차에 따라 광녕을 거쳐 6월 4일 귀국했다.

최부는 조사를 받거나 송환절차를 받는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조선에서 온 학식 높은 관료를 만나기 위해 중국 지신인들은 서로 찾아와 대화를 청했다.

최부는 표류하여 귀국할 때까지 항상 상복을 입었고, 명나라 황제를 알현할 때도 옷을 갈아입지 않겠다하여, 중국 관리들이 애를 먹기도 했다. 충과 효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 성리학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부가 귀국하자 성종은 그간의 일일 보고서로 작성하게 했는데, 당시 일기를 역은 책이 ‘금남 표해록’이다. 명나라 말기,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나 강남 일대의 실정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기에, 당시 동아시아를 연구하는데 매우 유익한 사료로 인정받는다.

‘제주도의 날’ 행사가 24일 중국 닝보시에서 24일 닝보도서관 등에서 개막했다. 제주도와 중국 닝보시가 공동주최하는 행사인데,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제주자치도는 행사를 위해 제주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참여로 제작된 공연영상, 영화, 도서, 사진, 해녀복 등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제주자치도가 제공했다고 밝힌 콘텐츠에는 마로의 △다원예술 ‘탐라순력도 다채로운 꿈’ △두근두근 시어터의 가족 음악극 ‘할머니의 이야기 치마’ △자르트의 퓨전국악 ‘계화타령’과 현대무용 ‘애월’ △오페라인제주의 창작 오페라 ‘해녀’ △한은주의 창작무용 ‘자청비’ △제주도립무용단의 ‘찬란’ 등의 영상물과 변성진 감독의 ‘헛묘’와 김승환 감독의 ‘이추룩선샤인’ 등의 영화작품이다.

그리고 △제주 해녀, 신화, 생태 등 관련 동화와 그림책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 등을 담은 사진작품 △김창열 화백의 작품과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 등도 제공했다고 밝혔다.

변성진 감독의 '헛묘'는 지난 1월에 열린 닝보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어 단편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해서 상영에 의미가 있다.

그런데 제주도와 중국 절강성이 최초로 적접 만나 조우했던 금남 최부에 대해서는 한 줄도 소개가 되지 않았다. 닝보는 최부 일행이 표착했던 영파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 극적인 만남을 빼고 어찌 제주와 닝보의 교류를 얘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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