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장태욱 편집국장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작가 박범신을 좋아한다. 젊어서 책에 맛을 들인 이후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토끼와 잠수함』, 『흉기』 등의 소설집에 실린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이 자본주의와 폭력적인 정치 환경 속에서 좌절을 겪거나 변질되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기에 좋다.

중편 ‘역신의 축제’나 ‘그들은 그렇게 잊었다’ 등의 작품이 전한 울림은 소설을 접한 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남았다. 불의한 권력과 싸우면서 스스로 부정한 인간이 되어가는 인물들을 향한 풍자는 오늘의 지배엘리트에게도 통한다.

소설 「은교」는 작가가 2010년에 발표한 소설로, 열일곱 소녀를 사랑한 노인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을 불륜소설로 이해하는 독자들에게 노인의 단순한 애욕이 아니라 삶의 유한성에 대한 존재론적 슬픔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품은 노인이 세상에서 배제된 채 젊은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세태에 대한 불만과 경계도 드러냈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느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 없다고…”

이후 작품은 2012년 4월 정지우 감독에 의해 각색된 후 영화 <은교>로 태어났다. 박해일이 노인 분장을 하고 이적요 시인의 역을 맡았고, 김고은이 한은교 역을 맡았다. 관객 100만 명을 동원했다던가? 결과는 그럭저럭했다.

영화 <미나리>와 윤영정 배우에 대한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한국 이름 정이삭)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쓰고 연출했다.

윤여정 배우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정에서 딸 모니카(한예리) 부부를 돕고 손주들을 돌보는 할머니 순자의 역을 맡았다. 아이들에게 화투를 가르치는 등 전형적인 틀을 벗어난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윤 배우는 그 역을 유쾌하면서도 따뜻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영화는 지난해 초 미국 여러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100여 개의 상을, 윤여정 배우는 30개가 넘는 트로피를 받았다. 지난달 12일,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열린 ‘2021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가 영국과 미국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윤여정 배우가 연기를 통해 거둔 업적과 시상식에서 남긴 위트 넘치는 소감 등이 합해져,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방송과 신문은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 운운하며 관련 내용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윤여정 배우가 거둔 성과는 참으로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특히, 70대 중반에 이른 여성 배우가 이룬 성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때 잘 나가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던가?

이 점에서 영화 <은교>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은교」가 세상에서 구석으로 밀려나고, 현실에서 좌절하는 노인의 현실을 그리고자 했지만, 영화는 젊은 배우를 노인 역에 발탁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감독이 작품의 주제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말았으니,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작품이 될 수밖에. 원작 소설의 정신을 훼손한 영화에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소설「은교」와 영화 <은교> 모두에 등장하는 말이다.

윤여정 배우에 환호했던 만큼, 이런 성과가 왜 국내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박범신 작가가 올봄에 시집 『구시렁 구시렁 일흔』(창이있는작가의집)으로 문단에 복귀했다. 윤여정 배우가 47년생, 박범신 작가가 46년생이다. 이들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