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특집] 감자가 전하는 이야기⑧

클루시우스의 『식물도감』에 실린 감자의 그림(사진='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에서 발췌)
클루시우스의 『식물도감』에 실린 감자의 그림(사진='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에서 발췌)

 

고대 안데스인들은 감자와 오카를 먹고 살았습니다. 안데스 지형은 깎아지른 절벽이 주를 이루는데, 다행히도 감자가 풍부하게 자생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현재에도 약 229종의 야생감자가 존재합니다.

야생감자에는 솔라닌이나 토마틴이라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습니다. 이 독성은 가열해도 없어지지 않아 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데스에 서식하는 비쿠냐(라마와 비슷한 포유류)는 감자를 먹기 전에 진흙을 먹어 감자의 독성을 중화합니다. 안데스인들도 비쿠냐의 행동을 모방해 진흙과 물을 섞어 소스를 만들고, 가열한 감자를 소스에 적셔 먹었을 것입니다. 안데스 고산지대에는 지금도 야생감자와 섞어 먹을 진흙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고대 안데스인들은 약 4000년 전부터 감자를 작물로 재배했습니다. 사람들은 계단 앞부분에 돌담을 쌓고 멀리서 흙을 날라 계단을 채우는 방식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쌓았습니다. 그곳에서 발쟁기로 밭을 갈고 감자의 구근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독성이 약하거나 없는 감자 품종이 개발됐습니다.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침략자들이 1532년 잉카를 정복한 후에, 정복자들은 잉카인들이 먹는 둥근 음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농부들은 1565년에서 1573년 사이에 감자를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나리아제도로까지 가져와 재배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수출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다양한 식물이 유입됐습니다. 유럽의 식물학자들은 신기한 식물들을 연구하고 그림과 상세한 설명을 담아 식물지를 출간하고, 또 새로운 식물을 추가해 개정판을 냈습니다. 유럽의 출판인쇄업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감자는 네덜란드 출신 천재 식물학자 찰스 클루시우스(Charles Clusius)를 만났습니다. 그가 활동할 무렵,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의 작은 일부에 지나니 않았습니다.

클루시우스는 당대 식물학자 가운데 가장 열정적이고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프랑드르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8개 언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천재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전을 관리했고, 은퇴 후에는 네덜란드의 레이덴에 있는 식물원 원장직을 맡아 아름다운 정원을 설계하고 꾸몄습니다. 그는 레이덴에 있는 동안 식물과 관련해 다양한 사람들과 인맥를 구축하며 여러식물 또는 식물의 그림을 수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1588년에 벨기에 몬스(Mons) 주지사였던 필리페 데 시브리(Philippe de Sivry)에게서 감자 덩이 두 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찰스 클루시우스는 감자 덩이를 땅에 심어 여러 개로 번식시킨 후 많은 친구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1601년에는 자신의 『식물도감』에 감자에 대한 그림을 실었습니다. 클루시우스의 식물도감에 실린 감자의 그림은 오늘날이 감자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감자(사진=장태욱 기자)
감자(사진=장태욱 기자)

마당발에 천재인 식물학자를 거쳐 감자는 유럽 여러 나라의 정원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감자는 유럽에 전역에 퍼진 후에도 다양한 편견에 시달렸습니다. 감자를 정력제라거나, 나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악마의 화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744년 프로이센 왕국에 기근이 들자, 프리드리히 왕은 백성들에게 감자를 먹을 것을 명했습니다. 감자가 음식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첫 번째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감자에 대한 찬반 논란이 오래도록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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