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확산하기 100년 전인 1920년 4월, 중국 사천성(四川省) 일대에서 첫 번째 콜레라 환자가 나왔다. 조선에서는 6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항에 들어온 일본 무연탄 운송선 신광환(神光丸)에서 조선인 인부 2명이 처음으로 콜레라를 앓았다. 제주도에서는 7월 21일에는 김녕리 해녀가 타지역에서 물질을 하다가 콜레라에 걸린 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후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콜레라는 계속 확산했고, 8월 말에 이르자 방역체계는 붕괴했다. 분노한 주민들은 방역사무소를 습격해 약품과 물품을 탈취했다. 질병과 의학에 무지했던 주민들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 대해 의료진들에게 분풀이했다.

9월이 돼서야 제주에 부족했던 의약품이 보급되고, 콜레라가 창궐하던 지역 주민 10만 명에게 예방접종도 시행됐다. 콜레라도 가까스로 종식됐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20년 제주도의 인구 20만1338명 가운데 콜레라에 걸린 주민은 9434명이었고, 사망자도 4134명에 이르렀다. 주민의 4%가 병에 걸렸고, 2%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전국 인구의 1.1%에 불과했는데, 콜레라 환자 수는 전국 콜레라 환자 수 2만4229명의 38.9%에 달했다.

잠잠하던 콜레라는 1946년 봄에 다시 기승을 부렸다. 이번에도 중국에서 발병이 시작됐는데, 중국에서 동포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돌아온 배에서 환자가 나왔다. 제주도에서는 육지에서 돌아온 선원이 6월 10일 콜레라로 사망한 게 1946년도 첫 번째 사례였다.

도내 의료를 맡던 일본인 의사들이 떠난 상황이어서 의약품과 의료용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미군정 방역당국은 9월 11일에 이르러서야 본국에 양품과 주사기, 의료품 등의 방역물품을 요청했고, 미국 민사국은 항공편으로 의료용품을 수송해 제주에 공급했다.

콜레라는 우여곡절 끝에 10월에 가까스로 종식됐다. 1946년 최종집계 결과, 제주도 콜레라 피해 현황은 환자 741명, 사망자 390명이었다. 환자 수는 1920년의 7%, 사망자 수는 9%에 불과했다.

제주대학교 사학과 고경호 씨는 올해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의료인의 활동 연구’에서 1946년 콜레라 피해가 1920년도에 비해 크게 줄어든 데에는 지역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도내 의료진은 의사 27명, 의생 5명, 한지의사 17명 등 49명에 불과했다. 한지의사는 의사의 보조역할을 하면서 도제식으로 일부 의술을 익힌 후 시험을 거쳐 일정 지역 내에서만 의료행위를 할 수 있었다.

논문에는 특별히 방역활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22명(의사 12명, 한지의사 7명, 의생 3명)의 이름이 나온다. 의료인 22명은 미군정의 동의를 얻어가며 마을별 방역실태를 점검하고, 환자의 발병 현황을 확인했으며 소독과 예방주사 업무까지 모두 감당해야 했다.

의료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살인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독립군이라 하겠다. 코로나19가 종잡을 수 없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맞는 광복절에 떠올리는 귀한 이들이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