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사로 가는 길(사진=장태욱 기자)
법정사로 가는 길(사진=장태욱 기자)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인 1918년 10월 7일, 신도 34명이 일본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의로 서귀포시 도순리 법정악 계곡 법정사에 모였다.

거사를 계획한 이들은 실행 6개월 전부터 격문을 작성하고 곤봉과 깃발 등을 사전에 제작했으며, 화승총도 미리 준비했다.

법정사 신도 34명이 7일 새벽에 선봉대로 산을 내려가 마을별로 참여자를 모집했는데, 영남리와 서호리, 호근리. 강정리, 하원리를 거쳐 중문리로 향하는 동안 참여자가 700명으로 불었다. 법정사 신도에게 사전에 거사 계획을 들은 주민도 있었고, 정구용이 배포한 격문을 읽고 참여한 자도 있었다.

이들은 서귀포와 제주읍을 연결하는 전선 및 전주를 절단해 통신을 차단했다. 그리고 하원리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일행을 구타하고 결박했다. 그리고 몽둥이로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파손하고 건물에 불을 태웠다.

우리가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이라고 부르는 거사인데,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에 진압됐다.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사 참가자들이 순사대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혹은 수배로 66명이 검거됐다. 당시 46명에게 실형이 선고됐는데,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더 무거운 형을 받을 정도로 탄압은 극심했다.

김연일은 징역 10년 형을 받았지만 징역 4년 1월로 감형됐다. 강창규는 징역 8년을 판결받았는데 징역 6년으로 감형됐고, 방동화는 징역 6년을 판결받고 3년으로 감형됐다. 장구용은 징역 3년을, 박주석은 징역 7년을 각각 판결받았는데, 징역 1년 6월과 징역 3년 6월로 각각 감형됐다.

강수오와 강춘근은 재판을 받기 전에 수감상태에서 옥사했다. 박주석과 김봉화는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 도중에 사망했다.

법정사는 창건 이후 8년여 기간 동안 지역민들에게 신뢰를 주고 주민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거사를 주도했던 김석윤은 전라북도 위봉사에서 출가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한 후 제주도에 들어와 관음사에서 함께 활동했다. 1909년 제주의병항쟁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관음사의 안봉려관과 함께 1911년에 법정사를 창건하고 1914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런 의미에서 법정사항일운동은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의병항쟁의 맥을 잇는 자랑스러운 운동이다.

하지만 일제의 하수인이던 친일 언론은 이 사건을 ‘보천교도의 난’ 혹은 ‘무극대교도의 난’ 등으로 보도하며 사이비 종교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참여자의 규모도 처음 700명에서 점차 줄여 나중에는 300명으로 축소해 보도했다.

다시, 법정사항일운동을 기억하는 10월이다. 서귀포신문은 올해도 코로나19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만, 법정악 계곡 아래로 도도히 흐르는 정신을 계승하는 일을 준비했다. 지난 2일에 법정사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법정사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경연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16일에는 시민과 함께 법정사로 소풍을 떠난다.

10월 법정이 오름에 밝은 햇살이 비추고 맑은 공기가 흐른다. 서귀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시 세우는 일에, 시민과 독자의 관심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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