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사진=서귀포신문 DB)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사진=서귀포신문 DB)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군은 제주도 내에서 성산포와 마라도에 군인 약간 명을 주둔시켰을 뿐, 군사적으로 제주도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3년도에 불시착륙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6만 평 규모의 비행장을 건설했다.

일제는 당시 알뜨르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1932년 8월 9일부터 1933년 3월 10일까지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의 토지 6만여 평을 수용했다. 그리고 주민을 동원해 비행장을 공사를 시작했다. 정식 항공기지로서가 아니라, 중국과의 전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중간 기착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제는 이 비행장을 적극 활용하기로 하고, 증설계획을 세웠다. 1936년 11월부터 1937년 2월까지 토지 약 15만 평을 추가로 사들이고 피난용 착륙장을 6만 평 규모에서 14만 7천 평을 늘려 20만여 평으로 증설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마을과 농경지 15만 평을 석 달여 만에 모두 매입했다니,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37년 8월 일본군은 중국의 광둥·장저우·난징·상하 등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당시 일본 항공기들은 나가사키 현의 오오무라 항공기지에서 출격했지만, 폭격을 마치고 귀환할 때는 제주도 항공기지로 들어왔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1년, 일제는 비행장을 약 65만 평 확장한다는 목표로 공사를 시작했다. 1933년도에 처음 불시착륙장으로 건설할 때는 6만 평에 불과했는데, 최종적으로는 80만 평 규모로 늘어났다.

알뜨르 비행장에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많은 도민이 동원됐다. 행정 기관이 중심이 되어 각 마을 이장에게 차출 인원을 할당하고, 이장은 마을 주민들을 몇조로 나누어 동원했다. 동원된 주민은 본인이 나가기 어려우면 대신 가족 중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했고, 돈을 주고 사람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일제는 엄청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도 태평양 전쟁에 알뜨르 비행장을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항복해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알뜨르 비행장 부지는 한국 육군의 제1훈련소로 활용됐다. 예비검속자들이 대대적으로 희생되는 아픔의 현장으로 남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비행장 부지는 국방부 소유로 묶여 있었다. 한국 공군이 1988년, 이곳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려다 제주도민의 저항에 부딪혀 포기한 바 있다.

구만섭 도지사 권한대행이 1일, 박재민 국방부 차관과 만나 제주평화대공원 조성을 위해 실무협의체 구성, 알뜨르 비행장 부지 무상사용 등을 내용으로 논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제주평화대공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7년, 정부와 제주도가 추진하려다 결실을 보지 못하고 주민 숙원으로 남은 사업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하모리 일대의 모슬포 전적지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평화를 주제로 관광코스를 개발하는 게 당시 사업 내용이었다.

그동안 제주도의 대표적 고통과 비극의 현장이던 알뜨르가 평화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계기를 맞았다. 알뜨르에 평화의 시간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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