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 희생자 추모제사진=장태욱 기자)
남영호 희생자 추모제(사진=장태욱 기자)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27분, 남해 여수 인근 소리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남영호(南榮號)가 파도에 부딪혀 무게중심을 잃고 한 시간 만에 뒤집혔다.

배가 기우는 동안 선장은 무선으로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한국 해양경찰은 12시간 가까이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어선과 순시선이 구조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최소’ 319명, ‘최대’ 337명이 목숨을 잃었고 남자 6명, 여자 6명 등 총 12명만 살아남았다. 우리 연안에서 발생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남긴 재난으로 기록된다.

남영호 참사는 돈벌이에 눈이 멀었던 선주 측에 1차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관리감독을 허술하게 했고 구조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며 사안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재난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그런 면에서 남영호 참사는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의 쌍둥이 사건으로 거론된다.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제주4·3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어서, 고통의 깊이가 깊다.

그런 고통에도 남영호 참사를 대하는 제주사회의 태도는 안일하다. 참사가 발생한 지 51년이 지나는 동안 사건은 일반인의 기억에서 잊혔고, 참사 이후의 세대는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한다.

남영호 참사가 망각과 단절을 겪은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사고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권위주의 시절에 발생한 점을 들 수 있다. 참사의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정부의 대책 등을 줄기차게 요구할 만한 세력이 미쳐 형성되기 이전이다.

언론의 태도에도 아쉬움이 있다. 당시 언론은 사고가 발생한 후 사고의 원인과 정부의 책임 등을 깊게 파헤쳤다. 그런데 정부가 수색 중단과 보상 등의 입장을 발표한 이후 언론은 남영호 사고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국회의 활동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국회는 그해 12월 23일, 남영호특위를 구성했는데, 활동기간에 1주일에 불과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유족들은 처음 사고가 발생하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시체인양과 사고원인 규명, 유족보상 등을 요구했다. 사고현장 인근을 방문해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고, 함께 시위도 벌였다. 정부가 사고 일주일 만에 선체인양을 포기한다는 태도를 보이자 부산 해운국 사무국을 항의 방문해 공무원 2명을 폭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족들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남영호 참사에 대해 공동으로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사는 곳이 전국 각지여서, 유족을 대표할 만한 단체도 공식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부위기 속에서 남영호 참사에 대한 책임자들은 대부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거나,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다. 1971년 3월 서귀포항에 세워진 위령탑은 1982년 9월 사람이 다니지 않는 돈네코 계곡 인근으로 옮겨지는 수모도 있었다.

15일은 남영호 참사가 발생한 지 51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제 늦었지만, 망각과 단절의 부끄러운 세월을 뒤로하고 다시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며,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시민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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