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택의 탐나는 올레(3)] 제주올레 2코스

길은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한다. 유년시절 불가의 출가자로, 다시 문화재 전문 공직자로,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 다시 명상 간경하는 불가의 시자로 돌아가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윤봉택 시인이 제주올레길을 따라 그 길과 마을에 깃든 흥미로운 제주(탐라) 이야기를 격주로 집필한다. / 편집자 글

 

제주올레 2코스는 2008628일 오전 10광치기해변에서 7코스로 개장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올레 코스가 재조정되면서 2코스로 명명되었다. 구간은 광치기에서 온평리포구까지 15.6km로써, 성산읍 고성리·오조리·온평리 세 마을을 지나는데 39리가 넘는다.

터진목의 벼락치듯 광치기가 없었다면, 성산일출봉은 시방도 통밧알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한라산 남쪽과 달리 조천에서 성산까지는 해안가 내수면을 안아 설촌된 마을이 많은데 오조리가 그중 하나다.

일찍이 1907년 전후하여 통밧알낮은 곳에 둑을 쌓아 해수 유입을 막아 논농사를 지으려 하였으나 그게 쉽지 않았고, 이를 활용하여 염전, 양식장 등으로 사용하려 했지만, 내수면이라는 열악함 때문에 그 또한 어려움이 많았다. 1991년에는 성산포 해양관광단지로 지정되고, 2007년에는 "성산 해양리조트 투자유치사업 타당성 분석용역"을 거쳐 개발하려 하였으나, 환경의 소중함을 지키는 노력이 우선되어 이제는 천혜의 철새도래지가 되었으니 큰 기쁨이 아닐 수가 없다.

 

둑방 ‘큰보’(사진=윤봉택 제공)
둑방 ‘큰보’(사진=윤봉택 제공)

호수 같은 통밭알을 가르는 큰보조근보를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 지나면 오조마을의 월대인 장시머들쌍월동산이 나타난다. 삼백예순 날 파도가 부서지지 않은 그 기슭에는 갯시왓물결 빚어 삶 전의 인연으로 다가와 닻 내리는 오조리포구가 있다.

이 작은 포구에 기대어 앉으면 그 흔한 등대 하나 없어도 항로를 잃은 적 없는 테우의 숨결을 계선주에 기대어 느낄 수 있어 좋다. 걷다가 서서 둑을 살펴보면 석축 양식이 대부분 일본식 견치석 쌓기로 되어 있어 일제 강점기에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도 둑마다 잠기는 이 마을 전설이 일천 이랑 물빛으로 열리는 해풍의 싱그러움을 예가 아니고서는 느낄 수가 없으리니, 잠시 멈추어도 좋다.

 

오조리 포구(사진=윤봉택 제공)
오조리 포구(사진=윤봉택 제공)

하면 6월 좋은 시간에 바오름기슭마다 달빛 시나위로 터지는 황근꽃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제주올레 2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족지물에 비추는 자기 내면의 세계를 보면서 여리게 아주 여리게 반 박자 걸음으로 순례하라. 그러다 보면, 오조리 건너 다시 고성리 지나 온평리 해안에서 문득 삶의 고운 인연으로 다가오는 일만의 인연을 만나너영 나영 둥그데 당실 하리니,

 

오조리 ‘논물’(사진=윤봉택 제공)
오조리 ‘논물’(사진=윤봉택 제공)

해 뜨는 마을 오조리의 정취는 골목마다 일어서는 작은 돌담에서 돋아난다. 7월에는 마을회관 앞 창고 새이 서쪽으로 50m 가면 논물이라는 연못에서 내 누님 닮아 고운 홍련을 만날 수 있다. 12월 지나 이곳에서 공펄동네지나 앞펄동네로 들어서면 수많은 철새가 반기고, 저 멀리 대수산봉과 함께 메누리ᄃᆞ리건너온 소금막이 그날의 그리움으로 물살 밀어내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걷다가 문득 동박새가 되어 고성마을 하늘을 낮게 날아보라. 식산봉에서 대수산봉으로 솟아오르는 봉수를 보게 되리니, 잠시 소남살을 넘어 갈대밭 길섶에 서 있는 중간 스탬프를 찍고, ‘두루목을 지나다 보면, 대수산봉으로 잇는 낮은 올레가 퐁낭 하나를 안아 장막동산에서 용트림하고 있음을 보리니, 하면 예서 쉬어 감도 좋으리라.

 

수산봉수(사진=윤봉택 제공)
수산봉수(사진=윤봉택 제공)

7km 지점 쥐영밧에서 큰물뫼까지는 20분 남짓, ‘물뫼뒤를 지나 가파른 오름 능선 따라 오르다 보면 하늘 트인 물미오름 정상 봉수터가 나그네를 반긴다. 예부터 봉수에 화덕이 있어 늘 화재가 끊이질 않자 봉수가 폐지되면서 먼저 화덕을 없애고 나니 화마가 사라졌다는 그 봉수에 서면, 1코스 두산봉·알오름·지미봉·일출봉, 1-1코스 우두봉, 2코스 식산봉, 3코스 통오름·독자봉까지, 제주올레 1~3코스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물뫼오름에서 내려 9km 지점을 지나면 암반지대 머들팟이 나타나고, 11km 지점 못미처에는 모른조동산이 있다. 이는 과거 목장 지대로 거친 땅이었다는 의미이다. 13km 지나면 고인돌이 있었던 괸돌나타나며, 좀 더 내려서면 혼인지가 보인다.

혼인지는 탐라 건국의 주인공 고··부 삼성이 온평리 해안에서 벽랑국 세 공주를 맞이하여 혼례를 올리고 나서 첫 밤을 지낸 신방굴허니문하우스가 있는 곳이다. 탐라는 삼성혈에서 시작되었으나, 외국인 벽랑국 삼 공주와 혼인한 곳은 혼인지라 부르는 흰죽으로, 이로 미뤄보면 탐라국에서 첫 국제결혼은 고··부 삼성과 벽랑국 삼 공주가 아닌가, 하면 이때부터 탐라는 국제화·세계화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 삼성이 사냥하다가 온평리에 이르렀을 때, 멀리 해안으로 밀려오는 상자를 발견하고서는 즐거운 소리를 내었다고 하여 쾌성개라 부르는 화성개에서 함을 건져 열어 보니,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함께 우마와 더불어 오곡 종자가 들어 있었고, 함에서 내린 삼 공주가 첫 발자국을 내디디니 이곳이 황노알이다.

 

혼인지 신방굴(사진=윤봉택 제공)
혼인지 신방굴(사진=윤봉택 제공)

··부 삼성과 삼 공주가 차례로 배필을 정하여 국제 혼례를 올리니, 지금 열운이또는 연혼포라 부르게 되면서 현재 온평리 마을 설촌 유래가 되었으며, 첫 밤을 보낸 곳이 혼인지의 흰죽신방굴이다.

이처럼 혼인지는 삶의 고운 인연을 맺어주는 인연의 땅이다. 혼인지 경내 신방굴로 내려서면 굴 내부에 고··부 삼성이 각각 첫 밤을 보냈던 신방 세 군데를 볼 수가 있는데, 이 동굴에서 탐라시대 전기(AD.0~300)에 유행했던 적갈색 경질토기 편이 발굴된 것으로 미뤄 이 주변이 일정한 주거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온평리 환해장성(사진=윤봉택 제공)
온평리 환해장성(사진=윤봉택 제공)

혼인지를 벗어나면 온평리 마을이다. 4·3 당시 성을 쌓았던 동문을 바라보며 제석동산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관전동네이다. ‘서천목의 경계 진동산허리를 따라 해안으로 쭉 내려서면 온평리 환해장성이 나타나면서, 높새바람에 흔들리는 준치들의 그네 타는 풍경이 새록하게 다가온다. 다른 동네와 달리 온평리에는 300m를 두고 포구가 두 개다. 동쪽은 동개맛서쪽은 섯개맛이라 하는데, 제주올레 2코스 종점은 동개맛이라 부르는 터웃개이다.

이곳 동개맛정자에서 한여름 더위를 날리시는 97세 김유봉(을축생) 할머님을 뵈었다. 이웃 마을 난산리가 친정이시고 19세에 온평리로 시집 오셨다. 평생 농사일만 하여 오셨다는 어르신, 우리 설운 어머님 살아 계셨다면 다섯 살 손아래이시다. 너무나 정정하셨다. 기억력도 좋으시고 얼굴도 참 고우셨다. 처녀 때 엄청 이쁘셨겠다고 말씀드리니 븽새기 웃으신 바다 닮은 그 미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돌아가는 길 애향 탑이 세워진 뜨락엔 두 뿌리에서 한 나무로 연리 되어 백 년을 살아온 백년해로 나무가 서 있으니, 이 나무를 보며 소원하면 백거이의 장한가가 아니더라도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어,’ 깊은 인연을 맺어 가리니.

백년해로 나무(사진=윤봉택 제공)
백년해로 나무(사진=윤봉택 제공)

 

필자 소개 글

법호 相民. 윤봉택은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4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였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바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강정마을에서 포교활동하면서 농사 짓다가 서귀포시청 문화재 전임연구원으로 23년 공직 근무를 마치고, 2014년부터 쌍계암 삼소굴에서 명상·간경·수행하면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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