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송주연 서귀포가정행복상담소 소장

송주연 소장
송주연 소장

오래 전, 안양여성의 전화에서 지금은 민주당 비례대표로 활동하는 정춘숙 의원을 모시고 활동가 학습을 하는 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 그분은 한국여성의전화 사무국장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때였습니다.

“활동가 여러분은 왜 여성운동을 하겠다고 이 자리에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을 때, 저는 “여성들의 동일임금 동일노동의 가치가 구현되는 세상을 내 딸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여성운동을 한 보람이 있을 것 같다”고 아주 결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정춘숙 사무국장이 알 듯 모를 듯 나지막이 “선생님은 오래도록 이 일을 하셔야겠네요”라는 말을 했지요.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제 딸은 세월이 흘러 결혼을 했고, 저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 변화는 요원하고 여성들에게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가치가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각설하고 지난 2월 22일은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이었습니다. 정부가 2006년 용산 아동 성폭력 살해 사건을 계기로 아동 성폭력을 근절하고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날을 지정했습니다.

아동성폭력과 관련된 올해의 뜨거운 이슈는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능력으로 인정한 특례조항이 지난해 12월 23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은 일입니다.

성폭력 피해자 영상녹화진술 제도는 성폭력 피해를 본 아동이나 청소년이 경찰과 검찰, 법원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여러 차례 다시 진술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트라우마 재발과 2차 피해를 막는다는 취지에 따라 2010년 성폭력처벌법이 제정되면서 도입된 제도입니다. 지난 2013년에는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작년 말, 대법원에서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여 가해자의 반대 신문권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등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6대 3의 의견에 따라 위헌 결정이 내려졌고, 이는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진술을 해바라기나 경찰서 등에서 녹화진술을 했더라도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법정에 직접 출석해서 가해자 측의 반대신문에 직접 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그간 지원했던 피해자들의 얼굴이 떠오르더니 차례대로 스러지는 것은 왜였을까요? 피해자들은 성폭력 범죄에 일단 노출되면 정말, 정말로 어렵사리 결심하고 상담소를 찾아옵니다. 그날의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긴장하고 떨림을 멈출 수가 없다면서 잠도 못 자고, 밥 한술조차도 제대로 못 뜨면서, 들숨 날숨을 나지막하게 뱉고,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는 피해자들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해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셀 수조차 없었는데 이제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부르면 나가야 합니다. 단어나 문장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나이의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재판부가 아무리 안심시키고 다독거려도 사건의 가림막 너머 가해자의 환영에서조차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하는데 이제는 부르면 나가야 합니다. 미성년인 성폭력 피해자의 심리적, 정서적인 이차 피해를 막기 위한 대안 입법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시급합니다.

이제 다음 주면 대통령 선거입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 미성년의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사회적 배려,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또 약자가 안심할 수 있는 성 평등한 세상은 투표 한 장으로도 결정될 수 있음을 이제는 믿고 싶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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