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장태욱 편집국장

원희룡 전 제주지사(좌)와 비탈리 클리치코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장(우)
원희룡 전 제주지사(좌)와 비탈리 클리치코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장(우)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 넣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은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의 십자가와 함께 순교의 마지막 잔영만을 남긴 채 신화는 끝이 났다. 민중 속에 장두가 태어나고 장두를 앞세워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섬 공동체의 오랜 전통, 그 신화의 세계는 그날로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

현기영 선생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문학실천사, 1999)에 나오는 내용으로, 제주4‧3 당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죽음을 묘사한 대목이다. 작가는 이덕구의 죽음으로 그동안 장두를 앞세워 중앙권력에 저항하는 섬의 오랜 꿈이 끝났다고 진단했다. 그만큼 정치‧경제적으로 서울에 예속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진단일 게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장두’를 다시 꿈꾸게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 보는 순간 한눈에도 심장이 뛴다. 키 203cm, 몸무게 112kg의 체구로나, 묵직한 언행으로나 장두로서 손색이 없다. 눈빛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판이다.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Kyiv) 시장을 맡는 ‘비탈리 클리츠코’(Vitali Klitschko) 얘기다.

그는 원래 쌍둥이 형제 블라디미르 클리츠코(Wladimir Klitschko)와 더불어 헤비급 권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프로 통산 전적은 45승 2패인데, 41승을 KO로 챙겼다.

두 차례의 패배도 경기 도중 부상으로 끝난 것이어서 매우 아쉽다. 특히 2003년 레녹스 루이스(Lennox Lewis)와의 경기는 전 세계 복싱 팬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6라운드에서 왼쪽 눈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고, 의사의 결정으로 경기는 종료됐다. 전문가들은 6라운드 가운데 4라운드에서 비탈리 클리치코가 우세했다고 평가했다.

비탈리 클리치코는 레녹스 루이스와 다시 대결할 날을 기다렸는데, 루이스가 은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재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비탈리 클리치코가 쌍둥이 형제 블라디미르 클리치코와 더불어 최고의 헤비급 복서로 자리 잡았다.

비탈리 클리치코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WBC 타이틀을 9차례 방어했다. 강한 턱, 긴 리치로 경기마다 상대를 압도했다. 87.23%의 KO율은 록키 마르시아노(Rocky Marciano)의 87.76%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비탈리 클리츠코 키이우 시장이 형제인 블라디미르 클리치코와 함께 무기를 들고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

그는 예비군에 입대하면서 “군인으로서 키이우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인은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끔찍한 시련 속에서도 진실로 남을 것”이라며 “조국에 대한 사랑이 우크라이나를 방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전후로 원희룡 전 지사의 행보와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원 전 지사는 대선에 출마한다며 도민이 준 자리를 무참히 던져버렸다. 당내 경선에 실패한 후에는 ‘대장동 일타강사’ 운운하더니, 선거 막바지에는 제주도에 내려와서 윤 석열 후보를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자처해고 윤 후보가 제주를 방문하지 못하게 됐다고 했지만, 윤 후보는 뒷날 제주를 찾았다. 최근에는 김부겸 총리 유임설을 언론에 얘기했는데, 당선인이나 김 총리나 근거 없다고 해명하는 일이 있었다. 가벼운 처신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제주도에서 윤 후보가 크게 패배한 배경에는 원 전 지사의 가벼운 처신도 한몫을 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거둘 수 없다.

이덕구 이후 장두의 꿈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한 때 이 섬의 지도자가 보여 준 언행이 저 멀리 중앙아시아의 살아있는 장두의 것과 비교되는 것은 내가 복싱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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