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한라산, 민초들의 생활터전 (3) ] 사라진 마을 상문리

과거 중문리 북쪽에 화전민이 일군 상문리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인데, 그곳에는 예전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아가 남아 있다.(사진=한상봉)
과거 중문리 북쪽에 화전민이 일군 상문리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인데, 그곳에는 예전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아가 남아 있다.(사진=한상봉)

중문동은 1981년 서귀읍과 통합해 서귀포시로 설치된 곳이다. 예전 오일장이 들어선 후 주변 작은 마을 주민이 장을 보러 오면서 상권의 중심지가 된다. 중문동에는 과거 몇 개의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마을지에 보인다. 중문동 마을지 『불란지야 불싸지라(1996)』의 기록이다.

‘과거 녹하지를 중심으로 한 인근 일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들이 지금도 남아 있고 이 일대를 상문리(上文里)라 부르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베릿내 일대에도 사람이 살았다. 더욱이 여기는 물도 풍부하고 식량 지원을 얻기에 좋았고…(중략)…이 부근 일대를 하문리(下文里)라 불렀다는 사실을 안다면 중문마을의 이름이 나올 만한 이유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까지도 하문리 베릿내마을에는 10여 호가 살았다. 일제강점기 1918년 제작된 ‘조선오만분일 지형도’ 제주지도에 중문리, 상문리, 녹하지모르가 보이는데, 그 이전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總)』에 중문리 호구 수는 132호이다. 반면, 상문리에 대해 ‘웃중문의 연가는 29호이다. 남자 35명과 여자 25명을 합하여 70명이고 초가는 70칸이다.(上文, 煙家二十九戶, 男三十五口 女三十五口,合七十口, 草家七十間)’라 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갑오경장(1894) 이후 상문리의 세대수 대강을 이해할 수 있는데 29호는 상문리의 자연마을이었던 사단동, 모른궤마을, 녹하지 오름 뒤의 호구를 합한 호구 수로 보인다.

지역민들은 상문리에 대해 위치에 따라 마을 지명을 달리 부른다. 상문리 중에서도 가장 아래쪽 마을을 ‘섯단동산(사단동)’이라 했고, 녹하지오름 동쪽 하천변 마을을 ‘모른궤마을’, 녹하지 위에는 각각의 거주자의 호칭을 따 ‘원서집터’, ‘오영감집터’, ‘아라리집터’ 등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옛 상문리에 남아 있는 돗통(사진=한상봉)
옛 상문리에 남아 있는 돗통(사진=한상봉)

1918년 제작된 지도에 사단동은 3채, 녹하지모르는 4채, 녹하지 북쪽에 15채가 보이는데, 상문리 사람들과 관련한 기록이 『대정읍지』에도 확인된다. 1989년에 일어난 방성칠(房星七)의 난에 가담한 주민의 이름인데, 상문리 양명모(梁明模, 35세, 전 좌수 15년 형), 상문리 양용이(梁用已, 44세, 농업, 종신형, 민군의 선군령(先軍領)), 녹하지 박신길(朴信吉, 47세, 농업, 종신형) 등이다.

이들은 화전민 징세에 저항하며 난에 참여했다. 무둥이왓 출신으로 방장군이라 불리던 방성칠의 묘는 아라동 ‘좁은허리’에 있다 10여 년 전 화장됐지만, 비석은 현재도 묘 터에 남아 있다.

이후 1901년 발생한 이재수(李在守)의 난엔 상문리 천주교인 사망자로 김종필(金宗弼), 김권삼(金權三), 김철생(金哲生)이 있음을 보면 이곳 출신들이 난과 관련하여 여럿이 희생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마을은 점차 쇠퇴하여 1948년 항공사진에는 녹하지오름 북쪽으론 집이 한 채만 보이는 것에서, 주민 대부분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옛 탐라대 서쪽 섯단동산(사단동)은 주택이 늘어난 걸 알 수 있는데, 녹하지오름 뒤에 살던 화전민들이 아래로 내려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중문동 어르신은 박0준의 선친 박00이 ‘모른궤’에 살았으며 이외 정0신, 정0신, 정0신 형제들이 살다 4·3사건으로 중문으로 왔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사단동으로 다시 올라가 살다 중문으로 내려왔다 한다.

맨 위 상문리 자연마을에는 여러 지역에서 집터가 발견되고 있어 상문리 마을 터임을 알 수 있는데, 지형이 대체로 평평하여 곡식 재배에 좋은 편이다. 돌방아와 화장실, 집터 형태 등이 남아 있으며 대나무와 양에(양하) 군락이 현재도 보인다.

상문리에 깨진 물허벅의 파편이 남아 있다.(사진=한상봉)
상문리에 깨진 물허벅의 파편이 남아 있다.(사진=한상봉)

상문리 ‘원서집터’에 살다 두 살 때 사단동으로 이주한 중문리 김0현 님은 상문리에 오영감 집터, 진0만, 진0만 형제의 집터가 있었고 아라리 집터란 곳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중 진0만 형제는 조상이 애월읍 하귀리였기에 일가가 있는 선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분의 얘기는 상문리의 실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에 일부 옮겨 본다.

“나는 상문리에서 태어나 8살에 해방이 됐으며 10살에 사단동으로 이주를 했다. 이후 4·3으로 중문리로 내려왔다. 농사는 잘 안 됐지만 지슬(감자), 메밀(메일), 산듸(밭벼) 등을 심었고 축산했다. 어르신은 민모르 앞에 살다 담배도 재배했다. 이후 아래 녹하지 뒤로 이사했으며 이곳은 과거 들판지역이라 소똥이나 말똥을 주워다 밭에 뿌려 농사를 지었다.

목장지대에 살던 때라 ‘촐왓’을 하며 돌담을 둘러 우마가 못 들어오게 했다. 해방 후 적산 땅으로 변한 이곳은 미군정 하에 누군가가 명의 등기를 하며 가져갔다.

섯단동산으로 이사할 당시는 16가구가 살았으며 이곳에 살던 박00, 정00씨 등은 4·3에 중문리로 내려갔지만 00락, 00원, 000성은 산으로 올랐다. 당시 중문리에 마을일 심부름을 하는 소서(급사)가 중문으로 소개해야 한다는 말에 가족이 중문으로 내려갔다.”

상문리의 주요 지명으로는 움텅밭(목장지), 시리오동이, 붉은목, 섶산이, 빗덕밭, 원서기터, 서궤밭, 대산오동이 등이 남아 있으나, 이에 관한 현지조사는 없는 실정이다.

산록도로 아래 ‘섯단동산(사단동)’ 역시 4·3으로 사라진 마을이 돼버려서, 사실상 상문리는 그 흔적인 양하, 대나무와 집터 등만 남게 됐다. 중문동 마을지에는 ‘섯단동산(사단동)’이 가장 큰 마을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1945년 이후의 상황만을 설명한 듯하다. ‘섯단동산’에는 이곳 주민들이 이용했던 물통이 숲 안에 남아 있으며 녹하지오름 뒤 상문리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울담, 돌방아가 남아 있다.

중문리에서 상문리로는 ‘염수굴잣도’를 지나 도련동산-등지모르(공동묘지 근처) 중문동 449번지 북쪽 중잣 경계와 만나 다시 1.4km 북쪽의 상잣과 만나게 된다. 이곳 상잣 입구 고 씨 비문에 한자 훈독으로 ‘사단동산’이란 지명이 보이는데 지역에선 ‘섯단동산’이라 불리며 사단동 마을 입구가 된다. 묘가 있는 동쪽으로 길을 따라 중문동 196번지 일원에 사단동 마을 터가 나온다.

‘섯단동산’ 위 중문동 2778번지 일원에는 1918년도 지도에 녹하지모르(鹿下旨)라 표시된 마을이 있어 모른궤마을 터가 나오는데 역시 숲 안에 있는 마을터로 중문동 청년회에서 이 일대에 삼나무를 조림했다.

조림지에 있는 ‘모른궤’ 사람들은 옆에 하천이 마르면 사단동으로 내려가 물을 길어 왔었는데 마을터 서쪽 냇가엔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시멘트 물통이 남아 있다.

이 상문리 지역은 4·3사건에는 녹하지알오름에 군경주둔소가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그 형태 일부를 볼 수 있고 레이크힐스 골프장이 들어섰다. 골프장에서 거린사슴 뒤 윤목으로 이어진 길가 옆에는 과거 지00 보살이 기도터를 만들어 사용했던 곳이 현재도 남아 있는데 존자암 이설 터라 잘못 전해지고 있다. 상문리는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 1950~1960년대 산으로 올라 목축을 하거나 나무를 구하는 곳이 되었는데, 이제는 일부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상문리의 서쪽 녹하지오름 곁을 흐르는 색달천 ‘가라리내’ 넘어 모라이악 사이에도 화전민이 천서동을 연결하며 있었다.

한상봉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저서 : 제주의 잣성, 비지정문화제100선(공저), 제주4·3시기군경주둔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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