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백을 기념하는 미술관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정가에 일고 있다. 도의회 문화관광체육위원회 이승아 위원장(오라동)과 강상수 의원, 변 화백의 아들인 변정훈 아트시지공익재단 대표 등이 7일에 만나 변시지미술관 건립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고 전한다.

변시지는 1926년 5월에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아버지 변태윤, 어머니 이사희의 5남매 중 4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부분 궁핍하게 살던 시절이었는데, 가족에게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다.

부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일본을 오가면서 신학문에 눈을 떴다. 그리고 세상이 바뀐 만큼 아들도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뜻을 세웠다. 그리고 1931년 아들 변시지를 데리고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변시지는 1932년, 오사카 하나조에진조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다쳤고, 그 일로 평생을 목발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소학교 3학년 때 아동미술전에서 오사카시장상을 받았는데, 그 일이 미술에 열정을 품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1942년에는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해 1945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동경으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하고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스승의 밑에서 변시지는 인물화와 풍경화에 전념했고, 1948년 23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일본 최고 권위의 광풍회(光風會)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변시지는 일본에서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하지만 일본사회는 천재 이방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변시지는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대학교에서 미대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변시지는 1957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런데 서울 생활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자유당 말기라, 패거리가 문화계를 지배했다. 부패한 사회에 변시지가 설 자리는 없었는데, 그는 절망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1975년에는 제주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44년 만이었다. 그는 제주의 풍광에 새롭게 자극을 받고, 향토색 짙은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엷은 황갈색을 화면을 전체적으로 바르는 방식으로 향토적 감흥을 유발했고, 돌담의 까마귀, 낮은 초가와 소나무, 구부정한 촌로 등으로 비애와 고독감을 표현했다. 그림은 질곡 진 섬의 역사와 이곳 사람의 삶, 부초처럼 떠돌던 화가 지신의 절망 등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변시지는 2013년 6월 8일 영면해 하원동 가족 묘지에 잠들었다. 내년이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고, 4년 후면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다.

7일 열린 간담회에서 도의원과 변 화백의 아들 사이에 긍정적인 얘기가 오간 것으로 전한다. 서귀포가 낳은 천재 화가를 기념하는 일에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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