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의 마음시 감상(90)

가을의 길목

         박인걸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낮에도 한기(寒氣)가 허공을 지배하고

마지막 호흡을 토하는 난타나 꽃이

초가을 햇살에 서럽습니다.

초록빛 숲은 서서히 유파(渝破)되고

유화(油畵)에 그려진 별 같은 잎들이

은행나무가지에 걸렸습니다.

자지러지던 풀벌레 소리도

현저(顯著)히 감소된 길섶에는

찬 이슬 맞은 들국화가 가엽습니다.

시간(時間)에 입력된 계절이

목록에 따라 질서 있게 처리될 때

늦여름은 붉은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오늘 가을 길목을 걷고 있습니다.

 

사진=pixabay.com
사진=pixabay.com

<마음시 감상>

문상금 시인

 

대세는 기울었지만 미처 떠나지 못한 늦여름이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난타나의 꽃잎을 더 붉게 만들고 있다.

 

초가을은 왠지 서럽고 억울하다. 그러나 서서히 가을 풀벌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길가 감들은 곱게 익어가고, 푸르렀던 숲의 나뭇잎들은 하나둘 가을의 추억을 기억하며 물들기 시작하였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별들의 색감을 받아들이며 노랗게 빨갛게 단풍들 준비가 시작되었다.

 

늦여름아, 이제 붉은 눈물은 흘리지 말라. 기꺼이 비워줌으로써, 새로운 이를 받아들이는 것. 떠나야 할 때는 여지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 삶의 질서라는 것을.

 

여름이 떠나가는 빈 의자에, 이제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 경계의 길목에 서서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오래도록 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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