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도서관, 나무와 숲 (36)] 인성리 팽나무 보호수 두 그루가 있는 집

인성리 고일·오미경 씨 부부가 사는 집 안쪽에 있는 팽나무 보호수(사진=장태욱 기자)
인성리 고일·오미경 씨 부부가 사는 집 안쪽에 있는 팽나무 보호수(사진=장태욱 기자)

대정읍성에서 일주도로를 가로질러 인성리. 작은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큰 팽나무의 오라(aura)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눈에도 오래된 나무인데, 거침없이 푸른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가 행인의 시선을 끌 만했다. 가지가 뻗어 나간 각도나 형상으로는 곰솔을 떠오르게 하는데, 가까이서 보니 팽나무다.

19일, 팽나무 노거수 두 그루를 찾아 대정읍 인성리 오래된 시골집을 찾았다. 집 입구에 들어서면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아래 작은 창고 비슷한 건물이 있다. 그런데 ‘창작 공간, 퐁낭 아래 귤림’이라는 빨간 간판이 걸렸다. 팽나무 노거수 아래 마당에 귤나무가 옹기종기 자라는 집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주변, 돌담에 전선과 전구 장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곳에서 예술 관련 작업을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집 입구에 팽나무 보호수가 있고, 그 아래 창작공간이 있다.(사진=장태욱 기자)
집 입구에 팽나무 보호수가 있고, 그 아래 창작공간이 있다.(사진=장태욱 기자)

예전에는 집 입구 주변에 팽나무 보호수가 한 그루 더 있었는데, 2016년 태풍 차바가 찾아와 부러뜨렸다. 사라진 한 그루는 표지판 기록으로만 남았다. 사라진 나무의 수령은 400년이고, 남아 있는 것은 300년이다. 일찍 찾아왔으면, 더 웅장한 나무를 보았을 것이다.

마당 안쪽 건물 동쪽 구석에 또 다른 팽나무가 있다. 좀 전에 골목에 들어설 때 오라를 과시했던 그 나무다. 나무가 하늘로 뻗어 씩씩하게 자라기는 했는데,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기둥 아래쪽에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나무 그늘에 아이가 탈 정도의 그네가 매달려 있다.

보호수 두 그루를 찾아간 터였는데, 팽나무 보호수 말고도 흥미를 끌 만한 얘기가 많았다. 노거수를 찾아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늙은 나무는 저마다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다. 그리고 들을 만한 사람을 만나면, 사람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이날도 그랬다.

나무와 집을 구경하던 중, 집주인 고일·오미경 씨 부부를 만났다. 낯선 이방인인데, 서로 경계심 내려놓게 재미있게 수다를 나눴다.

집은 부인인 오미경 씨의 친정집이다. 오미경 씨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았다. 집 안 구석구석 추억이 서려 있지 않은 물건이 없다.

“마당 입구에 있는 팽나무에 큰 구멍이 있어서, 내가 어려서 그 구멍 안에 들어가 숨기도 했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그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됐고, 빈 구멍은 충전재로 채워졌어요. 이 나무는 가만히 보면 할머니 같은 느낌이 들어요.”

서귀포시가 최근에 보호수로 지정한 동백나무 보호수(사진=장태욱 기자)
서귀포시가 최근에 보호수로 지정한 동백나무 보호수(사진=장태욱 기자)

오미경 씨가 볼거리가 더 있다며 집 뒤쪽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오래된 동백나무인데, 서귀포시가 최근에 보호수로 지정했다고 한다. 수령이 200년은 됐는데, 표지판에 수령 150년이라고 적힌 게 불편하다고 했다.

집 서쪽 구석에도 볼만한 나무 한 그루가 더 있다. 병귤나무 고목인데, 태풍에 상처를 입고 나무의 위쪽에는 가지가 별로 없다. 주변에서 병귤나무 가지가 부러졌으니 베어버리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나무를 살리셨다. 집 구석구석에 오래된 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나무를 소중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미경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이후에는 미술과 관련한 일을 했다. 그리고 같은 미술을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고 딸도 낳았다.

오래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지난 몸이 좋지 않아 2017년부터 서울에서 오래도록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일로 친정집이 비게 되자, 남편 고일 씨와 함께 귀촌을 결심했다.

하던 일이 미술이라, 귀촌 후에도 미술과 관련한 일을 했다. 이곳에 창작공간을 마련하고,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는 추사관과 공동으로 입주작가를 모집해 아트캠프도 열었다. 그리고 2021년에는 예술인들이 강사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고목 프로젝트도 개최했다. 최근에는 제주 천연염색에 관심을 품고, 염색을 체험하며 시간을 보낸다.

주인의 허락을 받고 창작공간을 구경했다. 남편 고일 작가가 창작한 조형작품이 몇 점 걸려 있는데, 숟가락과 젓가락, 철사 같은 것들을 엮어서 총 모형을 만든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밥벌이가 전쟁 같은 현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가파름, 중년 가장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짐이다. 그래도 늙은 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그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새로운 한 주를 푸르고 싱그럽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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