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이야기 (34)]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 문화센터 고기복 대표

평생 “부지런 부자는 하늘도 못 막는다”는 신념을 갖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분이셨지만, 부자가 되지 못하셨던 우리 어머니.

고기복 대표
고기복 대표

한 세대 전에 자식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데모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지만 매일이다시피 최루탄이 날리는 교정에서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자식들은 어른들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작은 누나가 경찰서에 붙잡혀 갔을 때, “집안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경찰 심문에 “농가 부채 천만 원”이라고 대답했었다. 그 말에 경찰은 버럭 화를 내며 “학생이 경찰을 우습게 아는 거냐”며 책상을 탁 쳤지만, 누나는 “경찰서에서는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하고 맞받아쳤었다.

그 일 후에 겨울방학에 입영 통지를 받고 누나와 경찰서에서 있던 이야기를 하다가 농가부채 천만 원이라고 답했던 사실을 입에 올리며 오누이가 키득거리고 있을 때였다. 농가부채라는 말을 들은 어머니가 “농가 부채는 무사”하고 물었고, 누나는 사실대로 털어놨다.

단단히 혼내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그 말은 졸바로 고라싱게”하시고는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다. 데모하다 경찰에 잡혔었다는 데도 화를 내시기는커녕 맞장구를 쳐 주시다니, 평소 데모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머니가 맞나 싶을 반응이었다. 나중에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어머니는 대학에 들어가서 데모하는 학생들은 집안 형편도 모르고, 집안 어른들 걱정하게 하고,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짓이나 하는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셨던 거 같다. 그런데 자식들이 집안에 빚이 얼마나 있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고 하니 내심 아이들이 이제 철이 들었구나, 집안 형편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셔서 “그 말은 졸바로 고라싱게” 하고 맞장구를 쳐 주신 거 같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데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에게 농가부채는 평생을 따라다닌 한이 서린 단어였다. 평생 쉬는 날도 없이 밭에서 일하고, 물질하며 살았지만 느는 건 빚뿐이었다.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런 어머니께서 자식이 경찰에 붙잡혀 조사받으면서 집안 재산이 농가부채 천만 원이라고 답했다는 말에 맞장구를 치신 건 그만큼 농가부채에 대한 원망, 농정을 책임진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보시기에 정부 관료나 정치인들은 농민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분시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흉년이 들어도,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도 농민들 형편이 어떤지, 심정이 어떤지 살피려 들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정부 관료들을 밭에 나가서 손발에 흙을 묻혀 본 적이 없고, 농민들 형편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입만 살아서 헛소리나 하는 ‘분시 어신 것들’이라고 역정을 내시곤 했다.

오늘날이라고 정부 관료나 정치인들이 분시 없기는 마찬가지다. 무역 자유화를 기치로 한 신자유주의는 농어업을 시장 경제 논리로 먼저 다루다 보니 정부는 농수산물 수입을 당연시하고 국내 농수산품과 가격 경쟁을 부추긴다. 그 결과 영세농어업인들은 가격 경쟁력을 잃고 생업을 계속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무엇보다 생산비 절감을 위한 기계화, 분업화, 규모화 등에서 뒤처진 영세농어업인들은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문제까지 떠안고 있다. 오늘날 농어촌 노동력 부족은 농어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정도다. 이는 농어민들에게 농가부채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다.

농가부채보다 무서운 건 노동력 부족이다.(사진=pixabay)
농가부채보다 무서운 건 노동력 부족이다.(사진=pixabay)

농가부채보다 무서운 농어업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그동안 외국인 고용허가제, 계절 근로자제도와 같은 외국인력 제도를 운용해 했다. 하지만 수요와 비교하면 공급이 달리는 문제와 함께 제조업을 근간으로 한 외국인력정책을 농어업 분야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민간 역시 산업구조조정보다는 저임금에 기대어 변화에 뒤처지다 보니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일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임금이 높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필수 인력임에도 여전히 이주노동자는 고강도 저임금 노동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여전하다는 말이다.

초저출산국가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농어업은 이제 변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변화만 아니라 인식까지 변해야 한다. 일차 산업 비중이 높은 제주는 미래 성장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적정 노동과 적정 임금이 필요한 존재다. 이주노동자라고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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