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한라산, 민초들의 생활터전 (4-1)] 서홍동 화전민 터 생물도

생물도 화전민이 살았던 집터(사진=한상봉)
생물도 화전민이 살았던 집터(사진=한상봉)

서귀포 중산간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따뜻하므로 화전마을이 여러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화전마을에 대해서는 각 마을지에 소개되고 있는데, 마을지마다 화전민 터를 언급하면서 화전지역에 대한 대강의 설명조차 없는 일도 있다. 이중 서홍동 지역에 있었던 옛 화전민 마을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다.

생물도는 서홍동 지역에 있던 화전민 마을인데, ‘추억의 숲길’을 오르다 만나는 돌방아 주변에 해당한다. 서홍동 마을지 『西烘爐(서홍로):1996』에 목축 관련 사항에 ‘생물도 : 목축지 안 우마의 먹는 물이 있는 냇도. 부근에 인가가 있었다.’라 기록돼 서홍목장 인근에 있었다고 지시한다. 하지만 같은 책 지명 편에는 ‘생물도(生水洞 ) : 목축지 안 위쪽 상잣 아래 있었음. 동쪽 냇가에 산물이 나는 데가 있어서 지어졌음. 성안 봉아오름에서 넘어온 진주 강 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았었다.’라고 기록됐다. 한편, 같은 책 연자골 화전 터와 관련하여 ‘연재골(燕子洞) : 생물도 동쪽 내를 건너는 곳. 애월에서 진주 강 씨가 넘어와 살다가 4·3사건 때에 희생되어 없어졌다.’라 기록됐다.

내용 중 책의 지명 편에 ‘상잣 아래에 있었음’은 잘못된 설명이다. 『제주 동부지역 잣담유적보고서 : 2016』를 보면 상잣은 산록도로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다. 생물도는 산록도로 위쪽에 있는데, 이곳 국림담(영림소담, ‘중언이켓담’이라고도 한다.)을 상잣으로 잘못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생물도 화전민이 사용했던 돌방아가 과거 사람이 살던 곳임을 증언한다.(사진=한상봉)
생물도 화전민이 사용했던 돌방아가 과거 사람이 살던 곳임을 증언한다.(사진=한상봉)
1948년 항공사진
1948년 항공사진

서홍동 마을지 안에 생물도와 연재(자)골이 왜 함께 설명되고 있는지도 의아하다. 연재(저)골은 동홍동 소재 솔오름 북서쪽 10시 방향, 560m 지점에 사람이 살았던 곳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서홍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와 관련해 마을지 『東烘誌(동홍지) : 2003』 화전마을 편에 ‘동홍마을 미악산(솔오름) 서북쪽에 연저골이란 곳이 있다. 연저골 서북쪽 300m 지점에 생수가 솟아나는 곳이 있다…(중략)…1930년대 15호가 화전생활을 하며 살았던 곳이다.’라고 기록됐다. 같은 책에 ‘산물어어위’가 소개되길 동홍동 산 20번지(속칭 장태코) 근처에 ‘연자골에는 15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으며…’라 되어 있다. 연자골이 동홍동 지경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1948년 항공사진을 보면 연재골엔 모두 다섯 채의 집이 보이는데, 이후 4·3사건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홍동 2172-3번지 인근 김 공(金公)의 묘비에도 이 지역을 ‘東烘洞 연저골’, 난대림연구소 내 길가 옆 유인김씨(孺人金氏) 묘비에는 연자동(燕子洞子作之員)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연자골이 동홍동에 속한 지명임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서홍동 ‘추억의 숲길’에 있는 돌방아 주변 안내판에 연자골은 무엇이란 말인가?

서홍동 마을지에 옆 마을 동홍동의 마을 화전 터를 함께 올리는 바람에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제주시에서 서로 다른 진주 강 씨 두 집안이 서홍동과 서홍동으로 넘어온 과정을 기록하면서 이들의 고향이 서로 바뀐 것도 오류가 발생하는데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생물도에 남은 샘물(사진=한상봉)
생물도에 남은 샘물(사진=한상봉)

마을지에는 성안 봉아오름(봉개)에서 넘어온 진주 강씨가 생물도에, 애월에서 넘어온 진주 강씨가 연재골에 정착해 살았다고 기록됐다. 그런데 족보를 확인해보니, 봉아오름(봉개동)에서 넘어온 강씨 집안은 동홍동 연자골 강씨였다. 마을지 설명에서 화전민의 원적지를 바꿔버린 것이다.

생물도와 관련한 화전동(火田洞) 호적초(戶籍草)가 호근리 고00 집안에 있어 확인했는데, 이곳 생물도 화전동에는 1895년 22호가 살다 1907년엔 7호로 준 것으로 나타났다.

‘추억의숲길’ 탐방로 돌방아가 있는 2564 번지의 소유주는 호근동 고00란 분으로, 증조부께서 당시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화전동호적초(火田洞戶籍草)를 남겼다. 증조부는 이곳 2564번지에서 훈장을 역임하신 분이며, 전하는 말로는 훈장을 하던 증조부가 국세(國稅)를 낼 때 주민들의 세금을 거두어 제주시까지 가서 대신 납부를 했다 하니 화전민들의 이장(里長) 또는, 호장(戶長)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은 1923년생으로 2564번지 생물도에 살 때 증조부와 함께 목축했었으며 우마 98마리를 키웠다 한다. 또한, 7대조 묘를 장전리에서 생물도로 모셔와(이장) ‘추억의숲길’ 돌방아 터 북쪽 언덕에 모셨다가 화장을 했으며, 근처에 법환리 강씨 집안 묘가 있었다 한다.

1915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시점에 부여된 여섯 곳의 번지 즉, 서홍동 2559, 2560, 2561, 2562, 2563, 2564번지 등만 남았다. 나머지 집터에 살던 이들은 1895년 이후 이주했거나, 토지나 대지를 등기하지 않은 결과다. 생물도 집들은 1895년 22호→1907년 7호→1015년 6호로 점차 줄어들었다.

필자가 돌아본 생물도의 위치는 서홍동 2559와 2564번지 사이로 현재도 당시 이용했던 집터 돌담과 올레길 등이 숲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중 한 채가 현 ‘추억의숲길’ 돌방아가 있는 서홍동 2564번지로, 생물도 중심지와는 조금 위쪽 국림담 곁에 남아 있다.

<계속>

한상봉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저서: 『제주의 잣성』, 『비지정문화재 100선(공저)』, 『제주4.3시기 군경주둔소』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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