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6) _ 정영자 수필가

정영자 수필가
정영자 수필가

눈이 부시다.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은행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한 계절을 건너가는 빛은 무명천으로 걸러낸 듯 투명하고 따스하다.

나무 아래 앉았다. 바람도 없는데 하나둘 떨어지는 은행잎을 무심히 바라보다 두 손으로 받는다. 스리슬쩍 스며드는 가을. 노란색이 선명하다.

지난여름 날씨라기보다 시련처럼 느껴졌던 무더위에 초록 잎 무성히 드리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오가는 이들을 불러들이던 은행나무.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 아래 앉아 여행기를 읽으며 지중해를 건넜고, 어느 날은 그냥 멍하니 앉아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푸른 하늘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끼리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무 아래 둘러앉아 서귀진의 역사를 들려주고, 허공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오랜 세월 나무가 바라봤을 이 거리와 사람들을 생각하며 추억 속으로 길을 떠났다.

서귀진이 있던 자리인 이곳은 문화재로 지정된 성터지만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589년에 이옥 목사가 축성한 서귀진은 조선 시대 제주의 방어유적으로 39진에 속한다. 1907년 폐진 후에 정의공립보통학교와 서귀포공립상소학교 등의 건물이 있었고, 광복 후에는 경찰서와 남제주군 교육청의 청사로 활용되었다.

성담은 반듯하니 다듬은 돌담의 형태로 복원되어 본래의 모습은 간데없고, 안내판에 부착된 탐라순력도 서귀진의 그림을 보면서 이곳의 역사를 읽는다. 그나마 복원 당시에 정방폭포 원류인 정모시에서 성안으로 물을 끌어오던 수로의 흔적이 발견되어 당시 생활의 한 면을 짐작할 수 있다.

한 달에 서너 번, 해설사란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서면 먼 길 돌아 제자리에 온 듯 편안하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온 가족이 둥지를 옮겨 다녀야 했던 시절. 서귀포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일 학년도 채 못 마치고 떠났다가 다시 5학년 때 돌아와 살았던 곳이 이 자리다. 한 학기 동안 머물다가 다시 떠났지만, 떠돌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건 친할 만하면 헤어져 버린 같은 반 아이들이 아니라 토막토막 연결되는 자투리 풍경이다.

화롯불이 타던 누런 다다미방과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먹던 동생의 꼬물거리던 손과 발. 이발소 나무 의자에 앉아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자르던 일. 까만 정복을 입고 출근하던 아버지를 따라 가방을 메고 나서던 어린 내 모습을.

시간을 거슬러 오른 회상의 끄트머리에는 자구리의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적산가옥 앞에 서 있던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꿈꾸듯이 따라온다.

그 어린 날에 이곳을 떠나면서 다시 올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부수고 다시 지어지는 개발 바람에도 잦은 이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의 잔상들은 용케도 붙들고 있다.

떠나고 다시 떠나면서 멀리 왔다 서글펐어도, 다시 돌아와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곳에 다시 섰다. 한때 나의 눈에 지녔던 유년 시절 기억의 이면에는 내가 몰랐을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요, 신의 섭리처럼 그 궤적을 따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잎을 다 내려놓고 시리도록 푸른 하늘 위로 거칠 것 없이 우뚝 치솟은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굵은 몸통의 나무껍질은 굴곡지며 벗겨지고 솟아 나온 마디마디 세월의 디딤돌 같은 옹이들이 박혀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서서 치열하고 고달팠을 삶의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 나무에 기대어 내게 박힌 세월의 옹이들을 들여다본다. 때론 맹렬하게 목표를 향해 달리던 순간이, 때론 거친 물살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위태롭고 고단했던 순간들이 스며들어 새겨진 흔적은 숨길 수 없는 나의 모습이다. 숱한 고비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넘기며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삶이란 게 허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길 가는 나그네를 불러 그늘을 드리워주던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우주의 시간표대로 살아가는 삶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다. 가슴으로 전해오는 이 미세한 떨림은 살아있음의 환희를 일깨워주려 함인가.

돌고 돌아 찾아온 은행나무, 내 어린 시절의 그 나무가 아니면 어떠랴. 힘들고 지쳐서 어딘가에 기대어 쉬고 싶어질 때, 혼자만의 방에 들어가듯이 찾아갈 수 있는 나무 한 그루면 족한 것을.

이 가을,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은행잎처럼 우아하고 완숙한 풍경의 시간을 한 올 한 올 짤 수 있을까. 오후 세 시의 빛으로 내 안에 스며드는 은행나무 실루엣이 고즈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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