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도서관, 나무와 숲 (39)] 충남 아산 외암마을의 느티나무 보호수

외암마을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점쟁이들이 모여 영업하는 장면.(사진=장태욱 기자)
외암마을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점쟁이들이 모여 영업하는 장면.(사진=장태욱 기자)

아산은 고려말 조선 초기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히던 맹사성(1360~1438)의 고향이다.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 자란 곳도 아산이다. 충무공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는데, 외가가 있는 아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과에 급제한 후에는 아산을 떠나 살았지만, 전쟁에서 순국한 후에는 아산 땅에 묻혔다.

아산 출신 선비로는 이간(李柬, 1677∼1727)도 빼놓을 수 없다. 이간은 외암마을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10세 때에는 서울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간은 당대의 손꼽히던 성리학자들을 찾아가 학문과 도를 논했다. 숙종-영조 대에 수차례 벼슬에 천거됐지만 응하지 않다가, 회덕 현감에 제수되어 한 차례 벼슬길에 오르기는 했다. 그런데 삼정(三政)의 문란함을 보고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에 관한 개혁안을 마련해 충청도 관찰사에게 제안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럴 때 강직한 선비가 선택할 길은 사직밖에 없는 법, 이간은 그 길로 관직에서 사임했다.

이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성리학 내에서 벌어진 호락논쟁에서 인물성동론(사람과 사물의 성질이 같다)을 주장함으로써, 서울 및 경기 지역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낙론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주말을 충남 천안과 아산에서 보냈다. 날씨마저 주말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발이 닿는 대로 외암마을로 떠났다.

외암마을은 조선 명종(1545~1567) 때 예안 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첫째 사위가 되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됐다. 그 후손 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자 차츰 예안 이씨 마을이 됐다.

60여 채의 전통가옥과 전통적인 농경 문화 등이 남아 있어 구성된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집의 구조를 현대식으로 일부 개조하기는 했는데, 초가와 기와의 원형은 100~200년의 역사를 품었다. 지난 2000년 마을 전체가 문화재(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 236호)로 지정됐고, 2021년에는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21일부터 23일까지 외암마을에서 짚풀문화제가 열렸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다.(사진=장태욱 기자)
21일부터 23일까지 외암마을에서 짚풀문화제가 열렸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다.(사진=장태욱 기자)
외암마을은 돌담이 정겨운 마을이다.(사진=장태욱 기자)
외암마을은 돌담이 정겨운 마을이다.(사진=장태욱 기자)

 

평소 같으면 시내에서 출발해 차로 10분쯤 가면 될 거리인데,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로 인해 좀체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겨우 외암마을에 근처에 도착할 무렵, 멀리서 풍물소리가 들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21일부터 23일까지 외암마을에서 짚풀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주차장이 가득 차서 갓길에 겨우 차를 세워야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저잣거리 체험이다. 과거 시장을 재현한 것인데, 주인을 한복을 입은 채 요리하고 방문객들은 파전에 막걸리를 맛있게 먹고 있다.

마을 동쪽 수확이 끝난 논에는 허수아비와 짚단 사이로 아이들이 부지런히 뛰놀고 있다. 사방에서 짚풀 타는 냄새가 풍겼다. 짚이란 수확을 마친 벼의 알곡을 떨어낸 줄기, 일종의 부산물인데 그게 축제의 소재가 됐다.

외암마을에 이르니 초가와 기와집 등 오래된 가옥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마을 안쪽을 휘감아 도는 돌담이 아담하고 정겹다. 제주도의 돌담보다 높이가 조금 낮은데, 화강암질이어서 색깔이 옅은 황색이다.

돌이 많은 땅 위에 자리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가지가 빈약하다.(사진=장태욱 기자)
돌이 많은 땅 위에 자리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가지가 빈약하다.(사진=장태욱 기자)
초가 너머 느티나무(사진=장태욱 기자)
초가 너머 느티나무(사진=장태욱 기자)

 

마을이 있던 곳은 주변 논과 달라서 돌이 많은 곳이었다. 과거 이곳 주민은 주변 논과 밭 등 토지의 습한 기운을 피해 물이 잘 빠지는 바위 언덕 위에 주거지를 배치했다. 돌담은 마을을 조성할 당시에 걷어낸 돌을 모아 만든 것이다. 과거에는 외암마을 사람들이 인근 역촌리와 돌팔매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오래된 느티나무, 이끼가 가득 낀 안내 표석에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다고 적혔다. 당시 수령이 600년이었는데 그 후에도 40년이 더 흘렀다.

밑동을 보면 사람 몸통의 몇 배인데, 가지가 별로 남지 않았다. 밑동 크기로는 가지를 드넓게 펼칠 만한데, 자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다. 마을이 돌밭 위에 형성됐기에 나무가 자라기에는 불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쪽에 썩은 부위를 충전제로 채워 겨우 나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무 아래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그늘막을 펼쳐놓고 있었다.

나무는 당산목으로, 마을을 감싸는 설아산과 함께 마을 주민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날 나무 주변에서 점술가들이 자리를 펼쳐놓고 관광객들에게 사주와 관상을 봐주고 있었다. 옆에서 점술가들이 하는 얘기를 엿들었는데 “한꺼번에 일확천금을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틀림없이 좋을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걸 누가 모를까마는 나무가 주는 부위기 때문인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영업하는 점술가들이 축제의 최대 수혜자일 게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나무를 쳐다봤다. 돌담과 초가 너머 우뚝 속은 나뭇가지를 보면서, 나무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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