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13)_오옥단 수필가

오옥단 수필가
오옥단 수필가

김장철이 되면 L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첫날밤처럼 서툰 칼끝에

   한 생애의 껍질이 하나하나 벗겨져 나간다.

   고스란히 맞이하는 소금 절임

                                           서로서로 지탱하며 살아온 풋풋한 몸뚱이들이

                                           최후의 순간에도 서로의 가슴마다 고개를 파묻고

                                   … (중간 생략)

                                           허무의 문을 닫는다

 

시적인 술회이다. 시가 아닌 생활에서의 김치는 허무가 아니라 소금 절임을 통과하면서 서로의 기를 적당히 죽인다.

아무런 불평이 없다. 전혀 다른 성격의 양념 배합은 절묘한 맛을 창출한다. 고춧가루를 중심으로 이십여 종의 개체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속살을 합치면서 한오라기 부끄러움 없이 밀착한다. 내 탓, 네 탓 잘난 척하지 않고 감싸고 포옹한다. 숙성 과정을 통하여 특유의 풍미를 자아내는 종합식품으로 태어난다. 마치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숙한 시민사회 같다고나 할까.

자성의 밀폐된 공간에서 긴 시간을 인내해야만 참 맛이 들고 유산균이 생성된다. 죽은 재료들이 신화 속의 마늘과 생강을 촉매제로 되살아나는 김치는 이 우주 시대에도 영원한 저장식품으로 이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아직도 선뜻 김치를 사서 먹을 용기가 없다. 만드는 과정과 재료를 못 믿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결벽증과 태생적으로 김치는 집에서 담가 먹는 식품이라는 고정관념이 몸살을 감내하면서도 김장 만들기에 매료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일천만 번 넘는 외래의 침입을 받았다. 그러는 과정에 생활양식도 변하고 전통의 순수성도 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120여 개 나라와 사돈을 맺어 국제결혼이 늘어나서 다른 나라의 며느리와 사위를 맞고 있다.

앞으로 더 늘어 날 전망이다. 그래도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생활 체험으로 어머니들 손에서 개발되어 온 지혜로운 식품은 김치임을 공감한다.

아울러 먼 나라에서 시집온 새댁들의 주방에서도 상큼한 김치 냄새가 풍겨 나오기를 기대하며 시 한 수를 보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국땅에

소박한 꿈 한 포기로 뿌리내리던 날부터

김장 한 번 담그니 일 년이 가고

서른 남은 번 배추절임 노하우를 발견 한 날

머리에 하얀 파 뿌리 얹고

환갑잔치 타령하더이다.

 

그때가 되면 이 나라에서도 김치는 세계로 우주로 수출길이 더 확대되고 타협과 절충의 미덕이 되살아는 김치 타령을 다시 부를 것이다.

 

한 가닥 비린내 풍기는 멸치젓갈 몇 숟가락에

누가 시샘할까,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

매운 고춧가루 버무림도 내색 없이

항아리 안에서 너랑 나랑 몸을 섞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건만

침묵 속에 무르익은 위대한 재탄생

시방, 막 달아오른 감칠맛 하나로

마침내 너는 자유, 평화, 민주공화국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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