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차례상(사진=장태욱 기자)
설 차례상(사진=장태욱 기자)

산업화 이전에 설은 가족이 모여서 음식과 덕담을 나누는 즐거운 날이었다. 설이 새해 첫날인데다, 농경의 휴식기에 있었으니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설날에 친척의 집에 모여서 돌아가신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게 세뱃돈, 아이들이 설을 가장 기다리는 이유였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실 어른들에게도 무슨 큰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이날을 위해 돈을 아껴 손자·손녀, 조카에게 세뱃돈을 쥐여줬다. 용돈이란 게 없던 시절이라, 아이들에겐 설날이 거의 유일하게 현금을 손에 쥐어보는 날이었다.

설이 기다려지는 이유 가운데 음식도 있었다. 지역마다 풍속이 다르기는 한데, 명절이면 가족과 친지가 상에 둘러앉아 맛난 음식을 먹었다. 다른 지역에선 설에 떡국을 주로 먹었다는데, 제주도는 조금 달랐다. 밥과 국, 고기와 생선, 채소, 과일, 떡과 빵 등으로 차례상을 차리는데, 상에 오른 음식을 나눠 먹었다. 정형화된 건 없지만, 쌀밥에 옥돔이나 고기를 넣은 국이 들어갔다.

더 오래된 예기를 하자면, 쌀밥과 고기국이 하이라이트였던 때도 있다. 쌀이 워낙에 귀했기에, 명절이나 제사에나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날은 쌀밥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농경시대와 달리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사는 세상이 됐고, 먹는 게 더는 귀하지도 않다.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다 보니, 아이들이 돈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쓸 수도 있다.

청소년과 청년 앞에 입시와 취업, 결혼 등 갖은 과제가 산적했는데, 만날 때마다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묻고 답하는 것도 지겨운 일이 됐다. 명절에 가족과 친지를 만나는 일이 그렇게 반갑지도 않다. 그리고 평소에 직장에서 업무에 시달리다가 명절이면 음식 장만에 동원되는 여성들은 이날만큼 괴로운 날이 없다. 주부들에게 명절은 스트레스의 상징이 됐다.

게다가 올해는 여러 가지 국내외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 금리가 가파르게 올라서 경기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가계마다 대출금이 쌓였는데, 이자 부담에 한숨만 나온다. 기업은 채용을 줄이거나 인원을 감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에 가족을 만나더라도 주고받을 기쁜 소식을 찾기가 어렵다. 이런데, 올해 설을 앞두고 날씨마저 싸늘하다.

그래도 설은 설이다. 살기 어렵더라도 조상이 행했던 대로, 세배와 덕담을 주고받은 기본은 지켜야 한다. 고향에 다녀오기 어렵다면 휴대전화로라도 인사를 올리고 안부를 물어야 한다. 부담될 말을 삼가고 덕담과 위로만 전해도 충분하다. 이 어려운 시대는 또한 지나갈 것이고 우리 곁엔 늘 가족과 이웃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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