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14)_이옥자 수필가

이옥자 수필가 
이옥자 수필가 

솜털이 뽀송뽀송 아가 손을 꼼지락꼼지락.

오름능선은 아직 춥다고 이웃들 기척이 없는데 언 땅을 헤집고 내민 고개에 분홍색. 흰색 불이 켜진다.

해가 바뀌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늘 스쳐 지나가는 것과 그 순간들 사이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완벽하게 살지 못한 자신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며 올해도 파이팅! 그런 합리화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을 자주 바라보자. 조금은 느슨해지는데 잠수하거나 피하지는 말자. 스치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행복은 참 사소한 선물이라고 하자.

며칠 전, 꿈에 새끼노루귀가 나타났다. 너무 반갑고 신이나 바닥에 찰싹 엎드리는 순간 꿈이었다. 언제면 주말 되어 봄꽃을 만나러 가나 주중이 한없이 길었다. 오름에 미친 적이 있어서 어느 오름엔 무슨 꽃. 열매가 피고 지는지 눈에 밟히는지라 동행만 구하면 만사형통이다. “들꽃에게 감히 잡초라고 이름 지어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며 매너 빵점이다.”라고 늘 자연을 대하는 일에 예의를 강조하던 신 선생을 유혹했다. 언젠가 눈 속에 핀 복수초를 보자고 둘이 종일 헤집고 다닌 적 있다. 체념하고 돌아가는 길, 미련 많아 한 번 더 하며 찾은 민오름에 복수초 카펫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무지함에 실소하였고 덕분에 들꽃 만나는 일이 잦아지고 친해졌다. 신 선생은 흔쾌히 내 가락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 목요일에 내린 눈이 산행을 질척이게 했다. 그래도 마냥 신나서 어떻게 하면 예쁘게 스마트폰에 담을 수 있는지 들으며 걷는 즐거움도 한몫했다. 무엇을 하기 전에 간절함이 있다면 행동하는 데 있어 다른 잡념은 사라지고 오직 그것에 집중하게 되어 있다. 복수초가 눈을 뚫고 피어나면 변산바람꽃이 나지막한 곳에 작은 것들에 귀와 눈을 모아 보라고 손짓한다. 정말 예쁘다. 온통 노랗고 흰 봄 꽃밭을 이룬다. 그 옆에 아주 작은 꽃이 보일락 말락, 하마터면 밟아 상처 낼 뻔했다. 너무 작아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 낙엽 위에 엎드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야 했다. 눈과 얼음을 뚫고 나오는 풀이라 해 파설초라고도 한다. 미나리아제비과에 속해 독성이 있다. 울릉도에는 섬노루귀가 살고 있다. 제주에 있는 새끼노루귀보다 훨씬 커서 큰노루귀라고도 한다. 꽃은 사뭇 다르다. 솜털 가득한 꽃대에 꽃이 핀 후 잎이 나는데 노루귀 닮았다.

눈 덮인 오름이라 작고 여린 노루귀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휘익한방에 날려 보내게 만들어 주었다. 잎이 돋아나기 전 파르르 떨며 꽃을 피운 노루귀를 본다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각이 느껴진다. 마음이 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몰랐던 그 상태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지 체감하게 된다. 눈을 뜨지 않은 사람에게 세상은 긴 어둠뿐이다. 봄꽃 만남이 그렇다. 심신의 눈을 밝혀준다.

자연도 행복해한다. 행복은 교감이고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나온 길이 아니라 지금이다. 새끼노루귀는 참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수강료 없이 배우니 고맙고 미안해진다.

새끼노루귀는 성품의 씨앗을 심어준다.

거친 생각들을 걸러준다.

귀로만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라 한다.

겸손해라. 단순해라 한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냥 행복하게 한다.

노루귀는 멘토이다. 상상력을 고취시켜 주고 기운을 북돋워 준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대부나 대모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안내하고 보호해주며 응어리를 풀리게 해준다.

새끼노루귀는 눈부시게 나를 만들어 주는 요술램프 속에 지니같다. 그를 만나러 가는 행보가 마음이 하나 되는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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