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고성진 시집 『솔동산에 가 봤습니까』(황금알, 2022)

책의 표지
책의 표지

70년 지난 낡은 시작 노트에서 건거올린 언어가 은빛 은어처럼 번뜩이며 튀어 오른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아름답지 않은 게 없는데, 서귀포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은 늘 우수(憂愁)로 가득 찼다.

고성진 선생의 유고시집 『솔동산에 가 봤습니까』(황금알, 2022)가 나왔다. 1940년대 이후 미술교사로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노트에 시와 그림을 남겼다는데, 가족과 지역 문인의 뜻이 모여 책으로 발간됐다.

작품 ‘밭’은 압축된 언어로 제주 여성의 비극을 표현했다.

내 밭에 묻어 달라/ 울던 할머니/ 제 밭에 묻었으니/ 이젠 안 울어 -‘밭’의 전문

제주여성은 어려서부터 물질과 밭일에 시달렸다. 4·3을 거쳐 남자들이 떼죽음을 당한 이후에는 모든 노동이 여성의 몫이었다. 일하면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는데도 할머니는 제 밭에 묻어달라고 했다. 죽어서야 노동에서 해방됐으니 그래서 더는 울지 않아도 된다.

‘풍과자’는 먹을 게 귀하던 60년대 풍경을 담았다.

십 원짜리 동전 하나면/ 펑과자 커다란 거 두 개다/ 바람에 날리고/ 물 위엔 잘 뜨겠다

값싸고 부피 크고/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은/ 바람처럼 간데온데없이/ 사라지는 연노란 쟁반 같은 과자 -‘풍과자’ 2연과 3연

펑과자를 풍과자라고도 불렀나보다. 10원에 두 개였으면 60년대 쯤 얘길 게다. 먹을 게 귀하니 먹으면 먹을수록 먹고 싶고, 먹으며 줄어드는는 게 여간 아쉽지 않다.

제주4·3과 관련한 슬픔이 읽히는 시도 있다.

소나무 죽어가는/ 소남머리에/ 사람 잃은 처녀가/ 시원한 바닷물 바라보며/ 목매어 죽어간/ 늘어진 가지에/ 작으만 새 한 마리 운다 -‘소남머리’ 일부

소남머리는 제주 4·3의 비극을 간직한 역사적 공간이다. 군인과 경찰은 남제주군 여러 마을에서 무고한 주민을 붙잡아 1949년 1월까지 소남머리 주변에서 처형했는데, 확인된 희생자만 248명에 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읽은 처녀가 소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는 데서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서귀포가 근대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의 풍경을 알려주는 시도 있다.

옛날 70여 전 엄마의 손에 끌려/ 이곳을 찾아온 적엔/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라 있었지/ 그 가운데 집만 한 커다란/ 바위 왕석 거북돌이 솟아 있었지

그 후 4·3난엔 노목에 빨치산 대가리가/ 두세 개씩 박처럼 달려/ 무서운 때도 있었지-‘솔동산 어디인지 가 봤습니까’ 2연과 4연

고성진 선생은 1920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젊어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2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수료한 후 서귀포에서 근대 서양화 보급에 힘썼다. 이후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는데, 미술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시작에 전념했다.

시집 발간위원장을 맡은 윤봉택 서귀포예총회장은 “일제강점기에부터 6.25를 전후한 격동의 시기에 고성진 선생이 2000여 편이 넘는 시를 썼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며 “서귀포 지역에서 외부 문인의 지도 없이 자체적으로 문학 활동을 펼친 선구자가 있다는 것은 서귀포 문학사에 귀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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