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영어로 고전 맛보기(47)] 넬슨 만델라의 법정 연설

I have fought against white domination and I have fought against black domination. I have cherished the ideal of a democratic and free society in which all persons live together in harmony and with equal opportunities. It is an ideal which I hope to live for and to achieve. But if needs be, it is an ideal for which I am prepared to die.

나는 백인 지배에 맞서 싸워왔고 흑인 지배에도 맞서 싸워왔다. 내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의 이상을 소중하게 여겨왔다. 그것은 내가 헌신하며 성취하고 싶은 이상이다. 그러나 성취하는 데 필요하다면 내가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이상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만델라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다.(사진=pixabay)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만델라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다.(사진=pixabay)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 ~ 2013)는 1918년 트란스케이의 수도 움타타의 한 작은 마을에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포트헤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흑인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고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그 이유로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화장실, 버스, 교육시설 등의 공공시설을 인구의 16% 정도였던 백인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정책을 시행했다. 만델라는 사회의 변화를 꿈꾸며 만델라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사상을 접했다.

1943년 바트바레트스란트 대학교에 입학했고, 1944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동맹을 설립해 흑인인권운동을 펼쳤다. 195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기도 했다.

1960년 3월 21일,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프빌이라는 마을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흑인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흑인 70여 명을 무참히 죽였다. ‘샤프빌 대학살 사건’인데, 만델라는 이 사건을 계기로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폭력 무장투쟁으로 돌아섰다.

1962년에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고, 수감 중이던 1964년에는 폭력혁명을 획책한 혐의로 다시 재판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해 6월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백인 정부는 흑인들의 오랜 투쟁과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해 1990년 2월 만델라를 석방했다.

소개한 대목은 만델라가 1964년 재판장에서 밝힌 최후 변론의 일부분이다. 그는 백인이 지배하든, 흑인이 지배하든 인종주의에는 철저하게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상의 이상으로 여기며, 이 이상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의지를 밝혔다.

피고는 법정에 서면 재판부에 선처를 당부하는 변론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만델라는 신념을 굽힐 뜻이 전혀 없다. 이런 감동적인 변론이 있었기에 국내외의 구명운동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1990년 석방하는 날에도 연설했는데, 연설 마지막에도 이 대목을 인용해 전했다. 감옥에서 26년이란 세월을 보냈지만, 신념의 변화가 없다는 의미였다.

만델라는 석방 후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남아공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공적으로 1993년에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4년 4월에는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흑인이 참여한 총선거를 통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대통령이 돼서는 과거 청산을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전 세계에 하나의 모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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