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영어로 고전 맛보기(50)] 테레사 수녀의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One evening a gentleman came to our house and said, there is a Hindu family and the eight children have not eaten for a long time. Do something for them. And I took rice and I went immediately, and there was this mother, those little ones’ faces, shining eyes from sheer hunger. She took the rice from my hand, she divided into two and she went out. When she came back, I asked her, where did you go? What did you do? And one answer she gave me: They are hungry also. She knew that the next door neighbor, a Muslim family, was hungry.

어느 날 저녁 한 신사가 우리 집으로 와서는 힌두교 가정이 있는데 여덟 아이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그들을 위해 뭐라도 해달라고 말했어요. 나는 쌀을 가지고 급히 갔는데, 그 집에는 엄마와 배고픔 때문에 눈동자가 더 빛이 나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엄마는 내 손에서 쌀을 받은 다음 반으로 나눠서 밖으로 나갔죠.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가 내게 전한 대답은 저들도 역시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옆에 사는 이웃인 무슬림 가정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를 기념하는 조각(사진=pixabay)
테레사 수녀를 기념하는 조각(사진=pixabay)

테레사 수녀는 1910년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는데, 위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가족은 비교적 넉넉했는데, 어머니는 손님을 잘 대접했고 자녀들에게는 가난한 사람을 잘 섬기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유아기에 1, 2차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등 세 차례나 전쟁을 경험했는데, 역설적으로 존엄성을 각인하게 된 계기가 됐다.

테레사 수녀가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종교에 강하게 의지했고, 그 결과로 가난한 사람을 더욱 정성스럽게 돌봤다. 당시부터 가난한 사람은 테레사 수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녀가 되기로 하고 로레토 성모 수녀회의 파견으로 인도 콜카타에 도착해 수련을 받았다. 21세에는 리지외의 성녀 ‘소화 테레사’를 본받고자 세례명을 테레사로 바꾼 후에, 성 마리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수도회를 떠나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갔다. 초기에 그녀가 받은 비난과 오해도 받았지만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녀의 돌봄은 서서히 인정받아 ‘빈자의 성녀’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전 세계로 확장됐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다 ‘요한 23세 평화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과 학위, 명예를 얻었고, 1979년에는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소개한 대목은 테레사 수녀가 1979년 노벨상 수상연설의 한 대목이다.

테레사 수녀는 굶주린 힌두교 가정의 엄마가 배고픈 무슬림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는 것을 예로 들면서 가난한 사람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사랑과 평화의 본성을 서로 실천하며 살자고 권했다.

그녀는 인류에게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몸으로 가르치다 1997년 9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인도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세계 각지에서 150만명이 찾아와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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