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민의 서귀포 오름 이야기(95)

남해 바다를 다스리고 있는 용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부모가 오냐오냐하며 워낙 귀하게 키우는 아이들 중에는 버르장머리가 없고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이 더러 있듯이, 용왕의 아들들도 그랬던가 보다. 용왕의 세 아들은 자라면서 용왕의 말을 안 듣고 용궁의 국법을 어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용왕이 어쩔 수 없이 국법을 어긴 세 아들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제주섬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용왕은 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귀양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들인지라, 귀양지인 제주섬 사람들이 자기의 아들들을 잘 대우해 주고 인정을 베풀어주어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내다가 귀양이 풀리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아들들의 귀양 생활을 몰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용왕의 기대와는 달리 제주섬 사람들은 용왕의 아들들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아니, 베풀지 않았다기보다는 베풀지 못하였다. 그건 제주섬 사람들이 워낙 어렵고 가난하게 살면서 입에 풀칠을 겨우 하다 보니 인정을 베풀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용왕은 자기 아들들에게 몰인정한 제주 사람들을 괘씸하게 여겨 앙갚음을 하였다. 용왕은 조화를 부려 제주섬을 물속에 잠겨 버리게 했다용왕의 앙갚음으로 인하여 제주섬은 3년 동안 많은 땅이 물에 잠겨 버렸다. 농사를 짓던 땅과 마을은 물론 높은 오름들도 물에 잠기곤 하였는데, 그때 중산간의 어느 오름도 물에 잠기다가 오름 꼭대기가 아주 아주 조금 물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남은 부분이 겨우 본지낭 뿌리만큼 나와 있었다고 하여 이 오름을 본지오름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전설은 성산읍 삼달리 지경의 중산간에 있는 본지오름에 얽힌 전설이다. ‘본지낭노박덩굴을 일컫는 제주말 이름이다.

본지오름 (사진=한천민 소장)
본지오름 (사진=한천민 소장)

 

본지오름은 성산읍 삼달리 지경에 위치한 오름으로, 표선면 성읍 마을에서 성산읍 수산리로 가는 두 줄기의 도로 중 남쪽 도로인 중산간동로를 따라 일출랜드 방향으로 가는 중에 있는 오름이다. 성읍민속마을 중간의 성읍1리 노인회관 남쪽 사거리에서부터 동쪽의 일출랜드 방향으로는 약 1.8km 지점에, 일출랜드 입구 삼거리에서부터는 서쪽의 성읍 민속마을 방향으로는 약 3km 지점에 이르면 본지오름을 만날 수 있다.

이 오름은 북쪽 기슭이 중산간동로에 인접해 있어서, 오름 기슭을 지날 때는 그저 숲이 우거진 작은 언덕으로 보이나, 남쪽의 들판에서 바라보면 동서로 기다랗고 가운데가 부드럽게 휘어져 들어간 말굽형 오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본지오름을 지도에서 찾아 지형도를 살펴보면 모양새가 마치 초승달의 오목한 부분을 아래쪽으로 하여 굽혀놓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송편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름의 안쪽 가운데 부분은 삼달리 공동묘지로 조성되어 있어서 수많은 묘들이 자리하고 있고, 공동묘지의 좌우 부분과 정상부의 북쪽 경사면은 모두 소나무, 삼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오름은 본지낭(노박덩굴)이 많이 자라고 있음에 연유하여 본지오름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주어인 본지낭은 한자 표기가 없지만, 발음을 음역하여 한자로 본지악(本地岳, 本支岳)’이라 표기하고 있다.

성읍리를 지나 중산간동로를 따라 약 1.8.km를 가니 본지오름 기슭의 삼거리에 이르렀다. 이어서 오름 서쪽 기슭을 따라 200m 쯤 내려가서 오름 서쪽의 넓은 공터에 접어들어 차를 세우고 오름을 올라갔다.

오름 서쪽 탐방로 입구에는 오름 방향으로 네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정상부로 올라가는 길이요, 두 번째는 삼달리 공동묘지 서쪽편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세 번째는 오름 남쪽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농로요, 네 번째는 오름 남쪽의 경작지로 향하는 비포장 길이다.

본지오름 정상부 (사진=한천민 소장)
본지오름 정상부 (사진=한천민 소장)

나는 정상부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정상부로 올라가는 길은 자동차 한 대가 넉넉하게 다닐만한 넓이의 비포장 길이었으며, 오름이 높지 않는 만큼 경사가 완만하였다.

올라가면서 주변의 나무들을 관찰하였다. 물론 본지낭이라 불리는 노박덩굴이 얼마나 자생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해송, 삼나무, 사스레피나무, 예덕나무, 천선과, 식나무, 생달나무, 팔손이, 까마귀쪽나무 등 중산간 지역의 여느 오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나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노박덩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 탐방로 주변에만 노박덩굴이 없는가 하고 나중에 오름의 다른 쪽도 살펴보았지만 오름의 어느 곳에서도 노박덩굴은 한 개체도 찾지 못하였다.

원래는 노박덩굴이 자라고 있었겠지만, 공동묘지를 조성하면서 없애버려서 남아 있지 않게 된 까닭일 수도 있고, 본지낭이 없는데도 처음에 이야기한 전설과 관련하여 본지오름이라 부르게 된 연유일 수도 있겠다.

보리수나무가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탐방로를 따라 정상부로 올라갔다. 정상부는 동서로 기다랗게 이어진 능선 위에 산화경방초소가 세워져 있었고 산불감시 요원 근무자가 근무하고 있었다. 산화경방초소 앞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남쪽으로는 막힘 없이 터져 있어서 멀리 바다까지 시원하게 바라보이고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몇 개의 오름들이 바라보였다. 바로 아래쪽의 경사면 대부분은 삼달리 공동묘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살펴보니 남쪽 방향으로는 남산봉, 달산봉, 재석오룸, 매오름, 토산봉들이 바라보였고, 북쪽 편으로는 모구리오름과 영주산이 바라보였다.

정상부를 지나 조금 동쪽으로 가니 탐방로가 북쪽 방향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탐방로를 따라 내려갔다. 이어서 오름 동쪽 기슭의 농로를 따라 내려간 다음 오름 남쪽 기슭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걸어갔다.

중간에 삼달리 공동묘지 동쪽편 숲속에 산담을 두른 묘가 있어서 그곳으로 가서 묘비를 살펴보았다. 1997년에 세운 掌議康公麗圭(장의강공여규)의 묘비였는데, 이 묘비에는 특이하게 이 묘를 조성한 곳의 이름을 三達境 시오름 南向이라고 오름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그 근처의 다른 묘를 살펴보니, 이곳은 1969년에 조성한 處士高公 孺人玄氏之墓(처사고공 유인현씨지묘)의 합묘로, 이 묘비에는 本地岳(본지악)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오름 서쪽 처음 탐방을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나온 다음에 오름 남쪽 들판으로 가서 그곳에 조성되어 있는 묘를 살펴보았다. 산담을 크게 두른 쌍묘가 있었는데, 오래된 묘비인지, 묘비에는 돌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제대로 읽지 못하여 주변의 돌로 이끼를 긁어내고 글씨를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이 묘비는 通訓大夫○○ 留鄕座首○○ 淑夫人玄氏之墓(통훈대부○○ 留鄕座首○○ 淑夫人玄氏之墓)로서, 이 묘비에는 旌義邑東南本支岳(정의읍동남본지악)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위에서 살펴본 다른 묘들과 마찬가지로 본지낭에서 음차하여 편리한 대로 한자로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묘비에는 묘가 조성된 때를 上元四十八年三月(상원사십팔년삼월)’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上元이 어느 왕 때의 연호인지 확인해 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보고 조사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또한 가장 최근의 조선의 국왕 중에서 48년 이상을 재위에 있었던 왕은 영조 밖에 없었는데, 이때에는 독자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영조 때의 묘가 아님었다. 그래서 더욱 연구한 결과 上元이라 함은 정월 대보름을 뜻하는 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추측하건대, 정의읍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과 사십팔년 삼월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48년 대보름 때에 조성한 묘일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위치 :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지경

굼부리 형태 : 말굽형(남쪽)

해발높이 151.9m, 자체높이 32m, 둘레 2,090m, 면적 120,987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