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20) 정영자 수필가

정영자 수필가 
정영자 수필가 

이따금 꽃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무심히 길을 걷다 만나는 다알리아 한 송이가 시선을 끄는 순간이다. 눈에 익은 꽃은 꽃잎 벌어지던 찰나에 스며든 기억들로 충만해진다.

초여름 날 마당에는 온종일 볕이 쏟아져 내렸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 채가 넉넉하게 자리하고 그 왼쪽으로 바깥채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비 오는 날에는 흙 마당을 밟지 않아도 갈 수 있게 마당 가로 디딤돌이 죽 이어져 있었다. 길게 이어진 디딤돌은 내 또래와 가위바위보를 하며 한 칸씩 건너뛰기 놀이에 알맞았다. 친구가 없어도 혼자서 겅중겅중 한 발로 건너뛰며 노래를 부르는 날도 많았다. 비가 오거나 볕이 나거나 디딤돌은 반질거리는 얼굴로 늘 누군가를 기다렸다.

구멍 숭숭 뚫린 검은 돌담을 배경으로 별이 내린 듯 마농꽃이 피었고, 다알리아는 풍성한 붉은 기운을 하늘로 올리고 있었다. 붉다고만 할 수 없는 그 오묘한 색을 품고 촘촘히 핀 모양이 고동을 모아놓은 듯 신기해서 턱을 괴고 앉아 눈을 맞추곤 했다.

오므린 꽃잎을 한참 보고 있으면 막 옹알이를 시작한 내 동생의 동그란 입이 떠올랐고, 이웃집 대학생이 밤하늘을 향해 불던 나팔이 보이기도 했다.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며 창가에 내려앉던 맑은소리는 노곤했던 하루를 곤히 쉬게 이끄는 자장가나 진배없었다. 지금 같으면 민원이 빗발치고도 남을 소음공해지만, 그때는 지치고 허한 가슴을 달래주는 낭만이었다.

어느 한낮 커피 향을 따라 들른 카페에서 그 기억을 되살려주는 그림을 만났다. 집 앞으로 황토색 장독대가 가지런하고 마당에는 다양한 화초 사이로 키가 큰 주홍색 나리와 휘적휘적 꽃대를 올리고 핀 다알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내가 기억하는 옛 모습으로 그림 속에 피어 있었다. 온화한 느낌의 색감 때문인지 정겨우면서 한가로운데 꽃들은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저리도 따사로운 꽃밭을 품은 작가가 누군지 궁금했다. 복사본 작품이라 그런지 작가가 누군지 적어놓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 이인성이 그린다알리아란 걸 알았다. 대구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천재 화가라는 설명이 따른다. 그가 그린 작품을 여럿 찾아보았다. 토속적인 색감에 정감 어린 묘사가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며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원작을 보고 싶은 마음이 움트고 있었는데 지난 오월 그 그림을 만날 기회가 왔다.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기증전에 전시하고 있었다. 인터넷 예매를 시도했지만, 초고속으로 접속하는 이들을 이길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다. 보고 싶다는 열망이 통한 것인지 확산일로였던 코로나 기세가 꺾어지면서 거리두기가 해제되었고, 예약하지 않아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전시종료 사흘 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시실 앞에는 남녀노소 줄이 길다. 함께 간 두 손녀의 지루함을 달래가며 한 시간여를 기다리고 전시실로 들어섰다. 전시실은 붐비는 사람들로 비좁게 느껴졌다. 그림을 보아야 하는데, 작품 앞에 가까이 서서 보는 관람객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작품을 향한 높은 관심에 비하면 관람 예절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속이 터졌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해되었다. 복사본 그림인 다알리아를 보고 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듯이 이들도 전시된 작품 속에서 자신들만의 무언가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우아하게 품위를 갖추고 좋아하는 그림과 마주하리라던 기대는 접고 그들의 시선 위에 내 시선을 살포시 얹혀 나란히 바라본다.

1940년대 어느 집 마당에 만발한 다알리아는 그날의 볕내와 바람결과 향기로 숙성되어 나를 깨우고 있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마당을 가득 채운 따뜻한 색감은 여유롭고 다정하다. 빛살 너울거리는 꽃줄기에 한가하고 나른한 오후 한때가 내려앉았다. 저 꽃그늘 어디쯤 단발머리 꼬맹이가 소꿉장난에 빠져있을 것 같다. 그랬다. 열한 살 무렵 그해에는 붉고 큼직한 다알리아가 꽃물결을 이루었다.

돌이켜보면 오며 가며 잡초를 뽑고 휘어지는 꽃대를 세워주며 고둥껍데기를 뿌린 어머니의 손길이 있었음이다. 풍성해진 꽃으로 마당은 출렁였고 아홉 식구의 소박한 일상을 귀하게 보듬어 주었음이다.

어째서 좋은 기억은 지나고 난 후에야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일까. 길가에 핀 한 송이 다알리아에서 걸어 나온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꽃으로 피어난다.

꽃송이 위로 후드둑 떨어지는 빗방울.

보슬비에 얼굴이 간지럽다고

우리 집 앞뜰에 달리아 고개 숙였네

기억 너머 강소천의 동요 한가락을 어설프게 흥얼거리는데, 비가 내리면 고개 숙인 다알리아 한 줄기 꺾어다가 푸르스름한 소주병에 꽂던 어머니가 환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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