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21) 오옥단 수필가

오옥단 수필가
오옥단 수필가

나의 어머니는 한시도 쉬지 않고 종종걸음 하며 일 년 삼백육십오일 힘겨운 일을 척척 해내는 불사조와 같은 분이셨다. 그 젊음의 억척은 노년에 무릎과 다리의 노화를 재촉하였지만.

우리 집은 흔히 말하는 대종가 집인데 어머니는 요즘 TV에 나오는 안방마님처럼 누려야 하는 권위도 편안함도 허락되지 않는 일 부잣집 필부일 뿐이었다.

사시사철 내내 품삯을 들여 몇십 명씩 일꾼들을 시키는 날이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 두어 말이나 되는 반지기 밥(보리와 쌀을 절반씩 섞은 밥)을 짓고 가마솥만 한 무쇠솥에서 콩국을 끓였다.

새벽밥을 먹이고 점심 바구니를 준비하셨다. 설거지는 언제 후다닥 해치웠는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논밭으로 나가야 했다. 주인이 동참해야 할 도리가 있고 간식(삶은 고구마)도 챙겨야 하고 그래야만 일꾼들이 부지런해지면 풍년이 따라온다는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대대손손 조부모님들의 기제사는 하도 많았다. 제삿날이 되면 철부지 아이는 좋아서 기가 살아 어깨를 으쓱거린다. 많고 많은 부엌일은 어머니만의 몫이었다. 수돗물은커녕 우물도 없는 동네였다. 1킬로 정도 멀리 있는 샘물로 가서 물 허벅(제주형 물동이)에 물을 길고 등짐으로 운반하는 일이 잦아졌다.

열두어 살 나에게도 작은 대바지(작은 물동이)로 물을 길어 오라고 시키면 덩달아 재미가 났다. 뒤뜰 안에 어른 키만 한 커다란 항아리 서너 개에 물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래야 안심이 되었다. 안방 한쪽에 검은 보자기로 덮어 놓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고 다시 감싸고 마당으로 텃밭으로 들락날락 시골집 부엌 문턱은 왜 그리 높았을까.

대가 집 부엌이래야 덩그러니 넓기만 할 뿐 땔감은 주워 온 삭정이와 보리 짚, 조 짚, 콩꼬질(콩줄기), 꽤꼬질(깨줄기) 등 농산 부산물이 전부였다.

아궁이마다 불을 지피다 보면 한쪽 불이 꺼지고 겨우 불을 살려 놓으면 다른 곳이 사그라지고 진종일 명멸하는 불꽃 앞에서 삼복더위와 싸우셨다. 어머니는 땀에 젖은 배적삼을 물에 헹구어 걸치기를 반복하며 잘도 견디셨다. 처마 밑에 쌓아 놓은 장작을 쓰면 조금은 편할 터인데 그마저 더 큰 일(혼사, 상례등)때 쓰려고 아껴두었다.

시루떡, 인절미, 송편, 절편, 나물, 산적을 익혀내는 걸 보면서 어린 마음에 엄마는 마술사가 아닌가 생각했다. 철이 들고 어머니의 솜씨를 하나씩 익히게 되면서 내심 몇 번을 다짐하곤 했다. ‘나는 절대로 이렇게 일 많은 집, 기일 제사가 많은 집에는 시집가지 말아야지

세상사엔 윤회라는 있는 것인가? 사람끼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인가? 나의 젊은 날의 만남은 유년 시절의 결심과는 그 절반만을 닮았다. 성실하고 민주적인 점은 만점 남편인데 집안은 종가이므로 친정어머니를 대물림하듯 시어머니에게서 기일 제사를 물려받았다.

남정네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하는 말이 웃프(?).

요즘 세상 참 살기 좋아졌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게 모두 여자들에게만 좋아진 거야.”

그래 맞다, 맞아, 세탁기에 냉장고,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전기밥솥, 수도꼭지에선 더운물이 철철, 그런 것 못 해주는 남편들 무능력하다는 말 듣게 마련이지.”

푸념인지 질투인지, 넋두리인지.

부엌살림은 격세지감으로 편리해졌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기일제사 날에도 매캐한 연기에 눈물 흘리지 않고 전기 팬을 사용하니 진땀 빼지 않아도 제수 음식을 차릴 수 있다. 개수대에선 터치만 하면 온수 냉수 번갈아 가며 쏟아진다.

팔십 평생 재래식 부엌에서 친정, 시댁 양가 어머니 두 분이 뿌리고 가신 땀과 눈물과 한숨을 시간으로 환산이 될까. 일생 삼 분의 일을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온몸으로 가솔들의 건강과 조상들께 바치는 를 흐트러짐 없이 실행 했다. 그 저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감탄하며 연민으로 쌓인다.

문득 그 힘은 이 세상을 밝고 맑게 보듬어 주는 끈끈하고 무한한 사랑의 힘이었고 모태의 뿌리에서 생성되었음을 감지하며 지극한 감사를 드린다.

부엌은 가족의 근간을 알뜰하게 가꾸는 보물창고다. 튼실한 가지들이 자라고 윤기 있는 잎들이 알찬 열매를 영글게 하는 위대한 영토다.

싱크대 위에서는 진솔한 삶을 조리하고 얼큰하고 담백한 맛을 조미하며 얼마나 슬기롭게 자기와의 자질구레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 남정네들은 진정 그 묘미를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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