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호남 도시공학 박사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2023년도 현대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 황유원 시인의 <하얀 사슴 연못> 일부다. 1100고지 휴게소에 가면 하얀 사슴상과 백록담의 유래를 기록한 비가 있다. 효성의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는 흰 사슴의 존재는 신비한 한라산 정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그 전설은 한 시인의 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한국 최고 권위 중 하나인 현대문학상 시는 아름다운 울림을 주는 것들이 많다. 안미옥 시인의 <지정석>, 마종기 시인의 <파타고니아의 양>, 허연 시인의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등이 그렇다. 이 시들은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이야기를 담고 음률을 머금으며 펼쳐진다. 한 번 읽어 보자.

 

귤을 만지작거리면

껍질의 두께를 알 수 있듯이

 

혀를 굴려보면

말의 두께도 알게 될 것만 같다

 

(중략)

 

숨어 있는 의미를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지정석> 부분 , 안미옥)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며, 말에는 다 이유가 있고 삶의 흔적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고독과 어울림의 모순적 일상을 전한다.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중략)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파타고니아의 양> 부분, 마종기)

 

머나먼 이국땅에서 양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시인을 발견한다. 어스름한 저녁의 장면과 스러져가는 양들의 사연이 화자의 과거를 연상시키며 애틋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부분, 허연)

 

선명한 소포 개봉의 순간은, 멀리서 잊고자 했던 연인의 날카로운 서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결말을 알아챈 화자는 깊은 눈물을 흘린다. 카타르시스라기보다는 비극에 가깝다. 하지만 그 비극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왠지 투명해지는 것 같다.

다른 시들도 있다.

 

갈매기는 반가워 끼룩끼룩 이리로 날고

파도는 신이 나 넘실넘실 저리로 춤추네

은비늘 눈부신 하늘을 타고

자꾸만 푸르게 날아간 아이들

방패연 가오리연 연줄을 끊어버렸네

금방 가벼워진 방패구름 가오리구름” (<> 부분, 최영철)

 

이 시는 경쾌 발랄한 3음보가 주류를 이루며 4음보의 장엄함이 엇섞였다고 이시영 시인이 분석했다. 시는 음률이 중요하다. 의미와 함축도 중요하지만 음악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노래가사는 기본적으로 시다.

어떤 사업가가 말했다. 자신은 불멍이나 물멍보다 시멍이 더 좋다고. 시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 짧은 순간, 머나먼 곳으로 데려다 주는 능력. 잠시 나를 잊고 너에게 집중하게 하는 능력. 그런 힘이 있다.

이런 속성의 시는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민중의 삶을 묘사하던 김수영, 신동엽, 신경림 등의 시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은 사회운동의 촉매가 되기도 했다. 시에 대한 예술성과 사상에 대한 논쟁은 늘 있어 왔지만, 시인이 가슴이 담아 둔 말을 꺼내는 것을 제재하긴 어렵다 하겠다. 어쨌든 어떤 시들은 사회를 움직이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 셈이다. 시는, 생산자가 되어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 활동인 음악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고, 사람의 의지를 다져 변화를 촉발하기도 한다. 백록담을 노래한 시는, 그 시에게 영감을 준 원천, 백록담을 사회적으로 재생산시키게 된다. 시는 치유자가 될 뿐만 아니라 생산자도 되는 것이다.

5월에는 시를 하나 골라서 읽어 보면 어떨까. 무덤덤한 감성이 갑자기 살아날지 모를 일이다. 치유와 생산이 갑자기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강호남 박사
강호남 박사

저자 소개

       강호남

       서귀포시 출생,  남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도시공학 박사

       건축시공기술사,  (주)델로시티 상무

       국민대 출강                            

       서울시 중구 건축위원회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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