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모두를 위한 이주인권 문화센터 고기복 대표

근현대사에서 제주인들에게 이주는 거창한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경제적 궁핍과 이념적 좌우 대립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고자 했던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이주였기 때문이었다. 1923년 대판(오사카)-제주 정기항로 개설 이후 급격히 증가했던 제주인의 도일은 해방 이후 많은 이의 귀향으로 이어졌지만, 4.3이라는 역사적 비극은 그들을 다시 일본으로 내몰았다. 지금이야 입출국이 자유롭지만, 한일국교정상화 이전에 밀항, 도항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이들의 이주는 일상적인 차별로 이어졌고, 조그마한 권리라도 주장하려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향을 잊지 않았다. 부지런하고 강인한 제주인들은 타국에서 상부상조하며 자리를 잡았고, 고향 발전을 위해서는 거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4.3 이후, 재일 제주인들이 항상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일본에서의 차별은 그렇다 해도 먹고 살기도 힘든 이들에게 사상적 의심과 쪽바리라는 비아냥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대개 재일 제주인들은 누구이거나 삼춘이 아니라 동네에서 가이()’로 쉬쉬하며 불리는 존재로 자리매김했고 우리와 구별되었다. 마땅히 우리어야 할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가이네(그들), 자이네(저들)’가 되어 버렸다. 민주화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나, 어깃장을 놓듯 피해자들을 폄하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이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던 올 4.3을 보면 그런 시선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안에 상처가 그러한데도 우리에게서 어떤 존재를 배제하는 현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대상이 원치 않게 제주를 떠난 이들이 아니라 이 땅을 찾아온 이들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다를 게 없다.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해서 이 땅에 있는 이들이지만, 우리가 아닌 가이네, 자이네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민들이다. 특별히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미등록자, 흔히 불법체류자를 일컫는 은어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필리핀인들은 미등록자를 TNT라고 부른다. 강력폭약이 아니라 숨고 숨는다는 뜻의 따갈로그, Tago ng Tago에서 따온 말이다. 숨어 지내다 보니 억울한 일을 당해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 TNT에 담겨 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미등록자를 ‘swasta’(개인, 비공개)라고 말한다.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어서, 있어도 없는 것처럼 고독하게 지내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자발적 격리를 택한 존재라는 뜻이다. 태국은 미등록자를 little ghost라고 부른다. 유령처럼 원혼이 떠도는 존재라는 뜻일 수도 있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라 그렇게 부른다.

이러한 은어들은 미등록자를 공통적으로 있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 권리를 박탈당하고 살지만 누구 하나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들은 사회 구성원이 아닌 외부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라 그들’, 타자로만 소비되는 게 현실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제주에 정착했는지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재일 제주인들이 경험했던 이주 과정과 닮은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가이요, 자이일 뿐이다. 재일 제주인들과 도내 이주민들은 우리는 누구나 타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음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주민들이 더 이상 가이네, 자이네가 아니라 우리가 되면 안 될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괸당마저도 가이네가 돼야 했던 제주의 아픈 이주 역사를 반추한다면 제주도정과 제주인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민들을 품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는 수천 가지다. 우리여야 할 가이네, 자이네가, 우리 곁에서 숨소리 죽이며 곱아야만(숨어야만) 살 수 있다면 콱콱 숨 막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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