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직의 음악칼럼 58
몇 년 전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와 유명 배우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 전해졌다. 워낙 유명한 세계적인 스타여서 그런지 안타까움이 더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아닌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그렇게 말이 많았던 것을 보니 행복하게 마지막을 함께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음악 역사에도 보면 당대 최고 스타 음악가들의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슈만과 클라라의 이야기다. 슈만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으며 클라라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지만 그들의 사랑은 음악가로 성공하기 훨씬 이전인 슈만은 20세, 클라라는 1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건 11세의 어린 철부지 클라라가 먼저 짝사랑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슈만은 처음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음악가의 길이 아닌 법대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배워온 피아노와 음악이론, 그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천재성, 이런 것들이 그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갑자기 법을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스무 살이 되던 해 슈만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법대를 그만두고 당시 피아노 교사로 명성이 높았던 비크의 문하로 들어갔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스무 살에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어서 주변에서도 황당해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슈만은 부족함을 단기간에 채우기 위해 가장 약한 네 번째 손가락 끈으로 묶어 강화하는 연습을 강행한다. 그러나 조급하고 무리한 연습으로 인해 건초염이라는 부상을 당하게 되고 결국 피아노를 더 이상 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은 이렇게 좌절 속에서 찾아오는 것인가! 마침 5개월에 걸친 긴 연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슈만을 짝사랑하던 16세의 성숙한 클라라는 상심에 빠져있는 슈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고 슈만은 이런 클라라의 마음씨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사실, 위에서 말했듯이 클라라는 슈만을 처음 아버지 비크의 문하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당시 나이가 11세였지만 슈만이 약혼녀인 에르네스티네와 헤어지게 되자 무척 안도했을 정도로 슈만을 좋아했다. 그러기에 슈만이 클라라에게 위로를 받은 뒤 둘의 관계는 순탄하게 발전하였고 다시 클라라가 긴 여주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둘은 첫 키스를 했다. 이때 클라라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슈만과 일생을 같이하겠다’라고 결심했다. 또한, 슈만이 비록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은 접었지만,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로부터 그의 창작력을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사랑을 축복해 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비록 장례가 촉망받는 슈만이었을지라도 자신의 딸을 맡기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판단한 비크는 극심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가난한 삶이 눈 앞에 펼쳐질 게 뻔한데 반대 안 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 게다가 클라라는 이미 10대 중반에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다진 터라 더욱 집중하여 명실상부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다. 결정적으로 슈만이 정신적 불안감이 극심하여 23세 때 자살을 기도한 전력도 있어 아버지로서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슈만은 반드시 스승인 비크의 허락을 받아 결혼하겠다는 소망을 갖고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비크의 마음은 더욱 굳어져만 갔고 급기야 ‘클라라 곁을 떠나지 않으면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라는 충격적인 폭언을 듣자, 그 소망을 포기하고 라이프치히 법원에 결혼 허가를 청원하는 소송을 내고 만다. 당시 독일엔 21세 이하는 미성년자로 분류되어 부모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오승직 지휘자 /음악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