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22) 오인순 수필가

오인순 수필가
오인순 수필가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이사를 했다. 거실에 앉으면 한라산과 오름에 펼쳐지는 푸른 나무들이 보이는 단독주택. 사방이 탁 트인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다. 직장을 다녀야 하는 나로서는 망설였지만 남편이 이 집을 너무 좋아했다. 이사만 하면 텃밭도 가꾸고 잡초도 뽑겠다고 했다. 공기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절물자연휴양림도 가까이에 있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도 마당과 텃밭이 있는 집을 갖고 싶었다. 어렸을 적 앞마당에 장독대가 있고, 채송화, 봉숭아, 해바라기가 피는 집에서 살았었다. 봉숭아꽃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이고 장독대의 된장을 퍼서 오이냉국을 만들어 먹던 기억은 나이가 들수록 잊어버릴 수 없는 추억이다.

어느 날 출근하면서 남편에게 잔디밭의 잡초를 뽑아 주기를 부탁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외였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제초제를 뿌리면 된다.”고 나와 있다며 손을 놓고 있었다. 황당해 할 말을 잃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앞마당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음악만 들으며 한라산만 쳐다봤다. “약속을 잊어버렸냐.”고 목청을 높여 보았지만 결국 뜰은 나의 몫이 되었다.

옆집 통장님도 뜰의 잡초를 아침마다 뽑고 있는 나를 보더니

잡초를 이기려면 한 달 이상 전쟁을 벌어야 해요. 뒤엎어 새로 심으시오.”

잡초와 전쟁이라니. 정말 제초제를 뿌려야 하나? 모두 그들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고 싶었다. 햇살 좋은 날 마당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면 얼마나 행복한가.

이빨에 낀 음식처럼 호미로 쪼아대면 맥없이 무너지는 잡초. 하얀 털의 노란꽃 개망초는 조금만 힘주어 잡아당겨도 뿌리까지 쑥 뽑혔다. 화단 돌 틈 사이를 누비며 감아 오르는 갈퀴덩굴과 숨바꼭질 하듯 군데군데 솟아오른 쇠뜨기와 앙증맞은 제비꽃. 나름대로 사랑스럽지만 마귀 할망처럼 모조리 휘어잡아 뜯어냈다. 토끼풀과 선피막이풀은 줄기마다 뿌리를 내려 있어 호미의 날카로운 끝으로 힘껏 내리쳐 악착같이 긁어내곤 했다. 뿌리를 못 찾으면 잎이라도 뜯어냈다. 이러고 나면 허리와 무릎이 돌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뻐근해지고 어깨도 팔꿈치도 손목도 시큰거렸다.

잡초는 뽑혔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솟아올랐다. 밟히면 일어서며 쓰러지지 않는 잡초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마당의 잔디밭은 오래가지 않아 이름이 무색해질 정도가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뜰을 외면한 채 바삐 살다가 밖으로 나가던 봄날. 오랜 만에 잔디밭을 보게 되었다. 놀라웠다. 잔디밭에 노란 민들레, 돌 틈 사이의 보랏빛 제비꽃, 화단의 하얀 수선화. 노랑, 보라, 하얀 색깔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수를 놓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꽃들에 다가갔다. 내가 심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초라는 오명을 씌운 것이 미안했다. 나의 편견으로 죄 없는 풀들이 이런 수난을 당했다니. 매몰차게 내리쳤던 호미질이 나에게나 풀들에게 손톱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잡초라 생각했던 꽃들과 갑자기 화해하고 싶었다. 잔디밭의 잡초를 더 이상 뽑지 않고 적당하게 깎아만 주기로 했다. 잡초와 잔디를 이편저편을 하지 말고 함께 하면 한 폭의 그림 같은 뜰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여태껏 나는 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물도 주고 양분도 주고 애지중지 아끼면서 그렇지 못한 것은 천덕꾸러기처럼 잡아 뜯어내며 내동댕이쳐 왔다.

뜰을 꼭 잔디로만 하는 게 좋은 것인가. 내가 심지 않은 것은 모두 잡초이려니. 잔디도 생명력이 강하고, 잡초도 생명력이 강하다.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면 그게 바로 천국이 아닌가. 뜰에 자라고 있는 풀은 하나하나 바라다보면 모두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잔디밭의 잡초처럼 대한 학생은 없었는지 오늘에 와 뒤돌아보게 한다. 나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약점만을 들춰내며 닦달해 왔는지 모르겠다. 나도 누군가의 뜰에 잡초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잡초 같은 이름 없는 풀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소중한 존재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힘들어도 꿋꿋이 이겨내는 일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뜰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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