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강호남 도시공학박사

퍼그워시는 캐나다 킴벌리 카운티에 있는 작은 어촌이다. 송산동의 두 배쯤 큰 면적에 인구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노썸벌랜드 해협 건너 <빨간 머리 앤>으로 유명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마주한다.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한창이던 195579, 버트란드 러셀과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그들(핵무기를 사용할 세계 정부) 사이의 모든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로운 수단을 찾을 것을 촉구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5777일 퍼그워시에서 과학자들의 첫 국제회의가 개최된다. <퍼그워시 회의> 7회는 6195일부터 미국 버몬트 주 스토에서 열렸다. 헨리 키신저는 여기에서 러시아 물리학자 이고르 탐,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흐보스토프와 만나 베를린 문제에 대해 대화한다. 이후 폴란드 소포트에서는 체코 정보부 앤터닌 슈네이다레트로부터 베트남 문제에 대한 소련 입장을, 소련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예멜랴노프로부터는 중국에 대한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외교를 통해 얻는 정보와는 다른 양상이었으나 매우 유용했다. 이 교류는, 공산주의와 대립이 극심했던 1972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결실을 낳는다.

1961, 미국 경제학자 폴 새무얼슨은, 소련 경제가 1984~97년 사이 어느 시점에서 미국 경제를 앞지를 것이라 예견했다. 미국은 냉전 중 소련과의 경쟁을 자신하지 못했다. 현실은 달랐다. 계획경제 하 소비재 품질은 낮았고, 공장은 낡았으며, 근로의식은 부족했다. 경제는 서방에서도 문제였다. 1968년 파운드화 합의(Sterling Agreement), 위태하던 영국 파운드화는 미국 달러의 90%까지 보장받게 된다. 이는 20세기 후반, 영국 경제의 후퇴를 상징했다. 기축통화로서의 파운드화 지위는 계속 도전받았고 마침내 미국 달러에게 그 지위를 내주었다. 세계 경제는 점차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964년 미국 랜드 연구소의 폴 배런은 소련 핵공격에 대비해 분산형 통신 시스템 연구에 착수했다. 이는 198311TCP/IP방식으로 전환된 아르파넷으로 이어진다. 인터넷이 탄생한 것이다. 이 기술은 서방 세계의 금융 네트워크를 강력하게 연결시킨다. 분산형 통신기술이 달러화 주도 세계화에 기여한 것이다.

헝가리 북서쪽에 소프론이라는 구()가 있다. 면적은 포천시 정도이고, 서북쪽으로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두고 있다. 때는 철의 장막이 아직 엄정하던 1989년 초. 헝가리 공산당 총리 네메트 미클로시는 주변 국가들의 시위 움직임을 살피다가 고르바초프에게 국경 개방에 대해 타진한다. 혹시 개방하면 군대를 보낼 것인지를. 그렇지 않을 것을 확인한 네메트는 52일 국경 철조망을 해체한다. 819일부터는 사람 통행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주한 대다수는 동독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서독행을 부추긴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그들은 서독 뉴스를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깨달았던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연결이, 국경의 작은 틈으로 1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내보낸 셈이다. 이 개방은 결국 베를린 장벽의 해체를 낳는다.

19911226, 소련이 해체되었다. 45년 냉전이 끝났다. 소련국 지위는 러시아가 이어받았고, 소비에트연방은 15개 국가로 나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개방을 실시했던 공산주의 국가 중국과 베트남은 현재까지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댐을 가두면 물이 차고, 물이 차면 압력이 커진다. 압력이 커지면 수문을 개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둑이 무너질 수도 있다. 연결은 필요하다. 작은 연결은 균열이 될 수도 있고, 큰 연결은 흐름이 될 수도 있다.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연결을 전면적으로 해야 하는지, 부분적으로 해야 하는지, 얼마나 지속해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압력이 커지도록 가두고만 있으면 결국 터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저자 소개

       강호남

       서귀포시 출생,  남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도시공학 박사

       건축시공기술사,  (주)델로시티 상무

       국민대 출강                            

       서울시 중구 건축위원회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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