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의 마음시 감상(107)

포도밭처럼

나희덕

저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살고 싶었다
산등성이 아래 몸을 구부려
낮게 낮게 엎드려서 살고 싶었다
숨은 듯 숨지는 않은 듯
세상 밖에서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다
입 속에 남은 단 한마디
포도씨처럼 물고
끝내 밖으로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
둥근 몸을 굴려 어디에 처박히고 싶은 꿈
내게 있었다, 몇 장의 잎새 뒤에서


그러나 나는 이미 세상의 술틀에 던져진 포도알이었는지 모른다
채 익기도 전에 으깨어져 붉은 즙액이 되어 버린, 너무 많은 말들을
입속 가득 머금고 울컥거리는, 나는 어느새 둥근 몸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포도가 아닌 다른 몸이 절벅거리며, 냄새가 되어 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퍼져가면서, 세상을 적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야트막한 포도밭의 평화,
아직 내 몸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아
사라진 손으로 사라진 몸을 더듬어 본다
은밀하게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던 것처럼

사진=pixabay.com


<마음시 감상>

시인 문상금

오래 묵은 포도나무를 본 적이 있다, 흡사 십자가처럼 바짝 메마르고 비틀어진 채로 화단 건물 벽 아래 툭 던져지듯이 숨죽여 있었다. 번쩍 푸른 줄기가 솟고 잎들이 무성해지고 그 줄기들은 옆에 먼나무를 기대고 타고 오르듯이 기어올랐다, 꼬물꼬물 포도알들이 송이를 틀었다.

, 그 생명의 신비랄까.

한순간 나도 평화스런 밭에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되어 살고 싶었다. 낮게 엎드려서 숨은 듯 숨지 않은 듯, 이 속에 남은 단 한 마디 포도씨처럼 물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한순간 술틀에 던져진 몸과 꿈은 으깨어지고 붉게 숙성되어 가면서 냄새가 되어 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 저 아득한 포도밭의 평화여, 어쩌면 이 세상은 원치 않아도 온몸을 내던져 문드러져, 진하고 붉은 혹은 투명한 포도주 한 병 빚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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