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25)_고혜자 사서

고혜자 수필가
고혜자 수필가

요즈음 줄 은갈치 상자가 손님을 마중하고 옥돔, 고등어, 은대구, 달고기가 순서대로 나온다. 수협구판장에서 비인기 상품들이 떨이로 할머니에게 넘기면 할머니들은 물고기들을 포구 구판장 입구에서 소매한다. 바람은 포구 주위를 감장 돌다가 출구를 찾는다. 할머니들의 언 몸을 휘감다 사라지고 계속 불어댄다. 비릿한 냄새가 삶의 현장의 필수인 양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다.

가끔 서귀포를 간다. 일 때문에 갔다가 시간이 나면 포구를 꼭 간다. 한가로운 갈매기들은 갯벌 위에서 조개를 파먹는다. 목이 긴 것만큼이나 콧대가 센 물새는 혼자 갯바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모두가 평화로워 보인다. 그들은 오로지 바다의 주인이다. “서귀포에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부자다라고 말한 고생진 시인의 글귀가 문득 떠오른다.

오늘도 물고기들을 만나러 간다. 오늘은 어떤 어종들이 좌판의 주인공으로 있을까 하며 마음이 설렌다. 되도록 첫 만남의 친구를 고른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고기를 산다. 그들은 세트 묶음으로 판다. 비주류인 셈이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여 물량 공세를 하니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에겐 재구매 인기가 높다. 오늘은 달고기를 사러 일부러 갔다. 달고기는 등판 부위에 둥그런 검정 달을 달고 있어서 달고기라 부른다. 입이 큰 만큼 창자도 비례한 것 같다. 그와 달리 나는 입이 작아도 창자는 크다. 많은 음식을 먹는다. 여덟 가지 채소에 과일과 생선을 먹는데 특히 달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는 더욱 맛있다. 고급진 요리 앞에서도 내 식성은 그야말로 게걸스럽다. 그렇게 빨리 먹는 식습관으로 비만이 왔고 당뇨가 왔다. 마치 자신이 달고기 같은 느낌이랄까. 마트에 이미 손질되어 진열된 작은 달고기만 먹다가 스케일이 큰 포구는 그 규모와 걸맞게 내 엉덩이 크기만 한 달고기가 대야에 있었다. 처음엔 징그럽고 무서워서 도무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달고기를 튀겨 먹었는데 맛이 담백하고 비린내가 전혀 나지않아 스테이크 재료로 안성맞춤이라는 걸 알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달고기를 기대하며 포구로 갔다. 역시 홍토색 큰 대야에 달고기가 있었다. 맨 마지막에 앉은 할머니 앞으로 직행했다.

할머니 달고기 포 떠 주실 수 있나요? 포를 떠 주신다면 전부 살게요

할머니는 흔쾌히 내 주문에 응해주셨고 열심히 고기를 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찬찬히 달고기를 옆에서 관찰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고기의 입보다 작은 칼로 달고기의 커다란 주둥이를 자르는 모습이 아등바등이다. 그녀의 칼춤은 갓 배운 솜씨 같다. 이와 반대로 옆집 아주머니는 지나간 손님에게도 마지막까지 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했다. 이미 다듬은 잡어에 굵은 소금을 뿌린다. 부패를 감속시키려 한다. 이런저런 모습에 악착같은 끈질김이 담겼다. 아마도 이 포구의 바람이 그녀를 만들었을 장본인일 거다.

달고기 여덟 마리를 손질하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오히려 부탁한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다. 마침 주둥이에서 나온 낚시가 그녀의 마미손을 낚았다. 총 구매가격 일만오천원에서 마미손 값 삼천원을 빼면 할머니는 이십오분 동안에 만이천 원을 번 셈이다. 마미손 낚시질에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게다가 전 창자도 먹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고기의 뼈뿐만 아니라 야구공 크기의 둥그런 창자를 해부하고는 그 안에 담긴 새끼 조기를 알뜰하게 꺼내 비닐을 긁었다. 다른 창자에서도 어린 돔을 꺼내어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전부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것들은 싱싱해서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난 요술 주머니 같은 창자에서 조기가 나올 때도 옥돔이 나올 때도 신기해서 달고기의 또 다른 세상인 창자 속이 왜 그렇게 컸는지 왜 부패가 더 빨리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건네준 무거운 검정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자 만오천원에 한 달은 거뜬히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다. 포구를 빠져나오자 쌉싸름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녀들처럼 아득바득 살고 있구나. 알뜰히, 살뜰히 모든 걸 챙겨가며 오늘 하루도 살아가는구나. 다음에도 그 마미손 할머니의 물고기를 사야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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