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27)_정영자 수필가

정영자 수필가
정영자 수필가

지루한 일상이다.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종잡을 수 없는 생각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듯하다. 마치 도려내야 할 종기처럼 똬리를 튼 나태함과 무기력함에서 이젠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 같은 게 지배하고 있었을까.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자리에서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들면 꿈이 찾아들었다. 늘 다니던 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거나, 무언가를 찾으러 나섰는데 안개 속에서 뱅뱅 돌다가 깼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몸이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았어도 잠자리에 들면 거짓말처럼 잊어버리고 고요히 잘 잤었는데, 날마다 이어지는 불면의 밤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만났던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 내일 이어갈 일에 관한 생각 등으로 복잡해진 내 머리는 어젯밤도 잠을 너끈히 앗아갔다. 이럴 바엔 차라리 인터넷 검색으로 밤을 새우자고 해서 일어나 앉는다. 컴 첫 창에 뜬 인터넷 운세. 묘하게 구미가 당긴다. 신년맞이 운세를 보러 다니는 친구에게 내 운을 왜 타인의 말에 의지하려 하냐며 핀잔을 주던 내가, 그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합리화하며 검색창이 시키는 데로 성별과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올린다.

이 새벽에 이어지는 나의 운세는 정동향 정북향으로 가는 게 유리하고 정서향은 피하라고 나왔다. 조만간 흉한 기운을 가진 사람과 만날 운이니 조심하라는 훈수에 흉한 운을 다스리려면 화려한 차림으로 외출하라는 조언까지 해놨다.

괜히 봤나 싶다. 흉한 기운이라니. 좋지 않다는 말보다 흉하다는 건 글자로만 보아도 찝찝하고 불길한 느낌이 확 든다. 출근길도 집에서 정서향으로 피할 수 없는 방향이라고 갖다 붙이니 맞아떨어지는 말인 것만 같다. 무단결근이라도 하고 불참한다고 한 모임이라도 가는 게 나을 것인지, 간다면 좋은 일이라도 생길는지. 서귀포에서 제주시는 정북향이니 차라리 가는 편이 나을까. 운세를 보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남은 잠마저 완전히 밀어냈다.

멀뚱멀뚱 어두운 천장만 바라보다 깨어난 아침이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 무겁다. 거울에 비친 초췌한 얼굴을 대하자 다시 흉하다는 말이 눈앞에 어정거린다.

에이 별일이야 있겠나. 내게선 피해 갈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에 해당하는 운세를 가지고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자신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화장하고 평소와 다르게 립스틱도 진하게 바른다. 옷은 뭘 입어야 하나. 보나 마나 옷장 속엔 무채색 옷들만 있는데 화려한 차림을 어떻게 할지 난감하다.

옷장 문을 열어놓고 고민하는 내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걸려있는 옷들을 뒤적여본다. 찾다 보니 몇 년 동안 입지 않고 걸어둔 분홍 원피스가 보인다. 지인이 작아서 못 입겠다며 준 유일한 유색의 원피스. 튀는 핑크는 아니어서 화려하달 수는 없어도 내가 가진 것 중에선 그나마 밝은 색상의 옷이다. 망설임 없이 입었다. 분홍이 받쳐주는 화사함이 좋아 보이는데 그사이 나잇살이 붙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좀 작다. 배를 힘주어 집어넣고 짐짓 등을 곧추세우고 집을 나섰다.

운전대에 앉아 시동을 거는 순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펴봐도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싶어 차에서 내렸다. 자동차 뒤쪽에서도 보이지 않는데 울음소리는 들린다. 이상하다 싶어 차 밑을 보니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바퀴 옆에 웅크려있다. 좋아하지도 않는 고양이가 하필이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굳이 여고 시절 포우검은 고양이를 읽고 나서 심중에 박혀버린 섬뜩한 감정을 들추지 않아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눈도 가늘게 떨리는 울음소리도 불길하다. 불현듯 어젯밤 운세가 떠올랐다. 땅바닥을 탁탁 쳐도 도망가려 않는 고양이. 어디 다쳤나. 손을 댈 수도 없고 난감하다.

주말이라 관리사무실 직원도 나오지 않아 도움을 청할 수가 없고 119에 신고하는 건 과하다 싶어 싫다. 어찌할 바를 몰라 동동거리고 섰는데 앞 동 출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나의 행동을 보다가 그깟 고양이가 뭐라고 답답했던 모양이다.

다리 다쳤네요

큼직한 두 손으로 고양이를 감싸 꺼내며 한마디 한다. 이분이 누구인가? 평소에 출입문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분이다. 뜻하지 않게 이분의 도움으로 나는 고양이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불운을 면할 수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우연한 일이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점이나 예언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본 운세가 기막히게 들어맞는 날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파트 출입구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를 좋게 보진 못하겠지만, 선량한 바람 한 줄기가 굳어버린 입가에 미소를 그려놓고 지나간다.

일터로 들어서자 안내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활짝 웃으며 어머 오늘 좋은 일이 있나 봐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 오늘은 운세 좋은 날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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