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28)_오인순 수필가

오인순 수필가
오인순 수필가

오일장에 가려고 나서는데 자동차 키가 놓는 곳에 없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없다. 부엌에도 가보고 전날 입었던 옷의 호주머니를 뒤져봐도 없다. 잃어버렸다는 것보다 잊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불안해진다. 신경이 곤두서고 차분하던 마음에 파도가 인다.

하루의 시작으로 돌아가 머릿속을 더듬거린다. 자동차 안의 가방을 꺼내려고 문을 열고 닫았다. 현관으로 들어오면서 돌 위에 자동차 키를 놓고 텃밭을 돌아보았다. 그것도 모르고 집 안에서만 찾으니 있을 리가 없다.

남편에게 자주 잃어버린다고 타박한 미안함이 밀려온다. 그는 잃어버리고 다니는 일이 너무 많다. 비오는 날 우산을 갖고 나갔다가 놓고 오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안경은 호주머니에 놓고 다니다가 꺾어지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 잦다. 모자도 비씬 것 싼 것 가리지 않고 자주 잃어버린다. 그 외에도 잃어버리는 종류가 다양하다.

한 번은 너무나 황당한 일이 있었다. 교직 생활할 때 남편은 유럽 여행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여행을 떠나려니 잃어버리는 일이 잦은 그가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아들을 멀리 보내는 마음이었을까.‘잃어버리는 것은 없을까. 여권은 잘 챙기고 다닐까.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여행 중간에 기쁜 목소리로 여행을 잘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안심이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 선생님과 함께 다니며 맥주도 마시고 즐겁게 다니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는 자신의 취향이라며 즐거워했다.

몽마르뜨 언덕의 화가들, 한없이 따뜻했던 센강의 언어, 촉촉하고 윤기 나는 찬란한 아침. 낯선 사람과도 미소로 주고받는 봉쥬르~”하는 묵직한 음성의 아침 인사는 다정하게 다가와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카페에서 새어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거리를 채우고, 어디선가 풍기는 고소한 빵 냄새와 짙은 커피향이 무딘 감각을 깨운다며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남편은 꼭 다시 오리가 다짐하며 우아하고 관능적인 파리에 빠지며 다녔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제주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조금 있으면 집으로 온다는 전화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가 환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그런데 가방도 없이 몸만 들어왔다. “가방은?”하고 물으니 아이구,

차에 놓고 내렸네하며 당황해 했다.

잠시 멈칫하더니 태연하게 남편은 나만 잃어버리지 않고 왔으면 되잖아하면서 오히려 당당했다. 나는 옆구리가 터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 회사에 급히 전화를 했다. 몇 시행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렸는데 어떻게 찾을 수 없냐고 물었다. “그 시간대 차에 연락을 해 볼 테니 기다려보라하며 친절하게 답

해 주었다. 몇 분 지나니 연락이 왔다. 하귀에 있는 사무소로 가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어이없었다는 기분은 사라지고 은근 슬쩍 웃음이 났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잃어버리는 것은 순간이다. 살다보면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르겠다. 세월이 흐르면서 화석이 되어가는 신체, 기억력은 나빠지고 쌓인 기억들 중 일부는 망각의 창고로 옮겨진다. 그러나 의미 없는 기억만 하나하나 털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머릿속의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나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착각인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데에는 의미와 상관없이 구분이 없다.

요즘은 책을 읽은 내용이 며칠이면 송두리째 새어나가 사라지고 만다. 밑줄 치며 필사까지 했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답답하고 막막하다. 이럴 때면 기억나지 않는 책을 왜 읽지?’라는 물음에 당황하곤 한다. 그렇지만 콩나물시루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여본다. 시루에 물을 주면 밑 빠진 독처럼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간다. 헛수고인 것 같지만 그 물로 몸을 적시며 콩나물이 자라듯이 서서히 스며들기를 바랄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보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의 불행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부터인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은 것은 아닌지. 나뭇잎도 낙엽 되어 떨어지지 않는가.

망각 템포는 쉬지 않고 걸어간다. 그리고 기억의 방은 비어간다. 오늘도 숨을 돌리며 나의 길을 찾아보고자 책을 부여잡는다. 또 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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