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31)_고혜자 수필가

고혜자 수필가
고혜자 수필가

살며시 미소 짓게 만든 김홍도의 어부의 낮잠은 나를 한참이나 그 앞에서 머물게 했다. 화폭 너머 양옆에 수양버들의 나뭇가지가 드리어져 있을 것 같다. 그 사이를 내려오고 있는 작은 배가 보인다. 신분은 양반이 아니라는 추측이 든다.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남자는 시동도 데리지 않고 홀로 배 안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강 상류에서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공간의 느낌이다. 윤슬의 모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감이 온다. 배의 고물 쪽에선 가는 선들이 따라오고 이물 앞에 있는 윤슬은 마치 가는 풀잎들처럼 짧고 가파르게 세워져 있다. 윤슬의 붓 터치의 변화로 유속이 변화가 보인다.

혼자 누워있으면 꽉 찰 정도의 공간 그 옆에는 소박한 어구 행장들이 있다. 언제 물고기의 입질이 올지 모르고 찌가 흔들리면 재빠르게 챔질해야 하는데 배 안에 있는 어부는 마냥 잠을 자고 있다. 기분 좋은 맞바람이 불어온다. 물결을 보니 바람결에 쓰러지는 가는 풀들이다. 얼굴은 고요한 이 풍경에 전염된 모습이다. 술에 취해 있는지 낙관보다 옅은 분홍색의 얼굴로 몸의 열을 발산하고 있다. 어부는 고물 쪽으로 노를 베고 누워 있다. 노동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이다. 옷소매를 걷어 올린 팔과 다리는 절 반즘 살랑거리는 바람과 햇빛을 가르고 있다. 옷 주름에서 느슨한 여유가 느껴진다. 주름 속에 겹겹이 품어 있을지 모를 삶의 질곡이 숨어있을까. 가로의 물흐름과 대조되는 둥글게 말다 떨어진 수직의 주름 결과 곡선 대칭을 이룬다. 잔잔한 선의 흐름을 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어부의 미소를 짓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라도 개의치 않는 휴식일까. 잠깐 눈을 감으니 짧고 깊은 잠으로 입문한 것일까. 마치 해먹 위에서 그네를 타는 기분이리라. 이쯤 되면 자기의 일을 잊은 채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신선이다. 이 어부는 얼마쯤 잤을까. 무릉도원의 한곳을 헤매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일까. 굳이 출구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곳에서 무한한 시간을 낚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배는 여울이 있는 데로 흘러간다. 서둘러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데 낮잠에 취해 있다. 아슬아슬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도원에서 복숭아 맛에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김홍도의 말년 그림일까. 영원히 직업 화가로서의 붓을 내려놓고 자신만을 위한 그림일까. 아니면 힘겨운 마지막 작가의 어려움으로부터의 도피적 낮잠일까. 긴 숨 몰아쉬는 한 남자의 삶을 반추하던 중 찰나의 오수일까. 찰나 생, 찰나 사일지라도 순간이 영원일 것 같은 꿀맛의 오수이면 해피엔딩이다. 꽤 오랫동안 발길을 붙잡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감상의 여운이 연실처럼 길다. 아슬아슬하지만 분명 사랑스런 작품이다.

현대인들의 낮잠은 어떤 것일까.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자는 도둑잠, 비행중 비행기 안에서 산소 결핍으로 곤하게 자는 잠 도서관에서 시험준비를 하던 중 책 위에 쓰러져 자는 잠, 이동하는 버스에서 코골며 자는 잠, 이렇듯 친숙한 현대의 낮잠 풍속도가 가까이 있다. 먼 훗날 이러한 낮잠들이 누군가에게 어떤 낮잠으로 그려질지 궁금하다.

현대인은 노를 베고 누울 시간이 없다. 더구나 무릉도원에서 복숭아 먹을 시간도 없다. 빨리 출구를 찾아서 제 갈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빈속인데도 불구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몰려오는 졸음을 쫓기까지 한다. 낮잠이라는 것은 낮에 자는 잠인데 밤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낮잠은 사치이다.

나의 낮잠은 어떤 것일까. 낮잠을 자본 지 오래전이다. 낮잠의 기억이 없다. 앞만 보고 달렸더니 피로가 졸음의 쓰나미에게 SOS를 쳤다. 무엇을 위해 달렸는지 의문을 가져본다. 과연 뭘 위해 달렸을까. 나의 일주일은 낮잠과 졸음이 다 가져갔다. 아니 낮잠에게 일주일을 기꺼이 주었다고 해야 한다. 강물 위도 황금물결이 일렁이던 대지 위도 아닌 삼십여 년이 넘은 낡은 소파 위에서 과한 낮잠을 잤다. 복숭아 대신 캠밸포도를 먹으며 다음 날를 기약하며 충전을 골고루 했다. 소파와 한 몸이 된 난 수시로 낮잠을 초대했다. 어쩌면 쇼파가 나를 잡아 당겼다. 달리지 말고 얼음 땡하라고.

9월 중순의 나의 오수는 잔잔한 파문을 주며 나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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