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35)_송영미 수필가

송영미 수필가
송영미 수필가

산책길에 만나는 돌담은 언제부터인가 허물어져 몰골이 추레하다. 켜켜이 담아둔 상처가 얼마나 버거웠길래 몸부림을 쳤을까. 새들만이 들락날락하는 돌담은 무수한 바람이 헤집고 지나갔을 터이다. 돌담 위에서 놀았던 추억이 뇌리에 즐비한데 마음은 그곳처럼 내려앉는다.

무뎌진 뇌의 파동을 부추기는 건 모닝커피 한 잔의 위력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무너진 돌담의 안부가 궁금하다. 한순간에 혹하다 권태로워 돌아서게 하지 않는 그곳을 운동화 뒤꿈치 누른 채로도 간간이 드나들었다. 끈끈한 피붙이의 문병이라도 가는 양 마음은 뒤숭숭하다.

어느 장인의 손길일까.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태세로 봉합이 완벽하다. 와락 덤벼들던 바람은 돌담 사이 숭숭 뚫린 트멍()으로 넘나든다. 슬쩍 곁을 내주는 돌담과 바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서로에게 열어 놓아 공존하는 자연의 의미는 미물인 사람이 거저 얻어가는 에너지원이다.

높은 돌담처럼 벽을 쌓아 소원해진 친구에게 마음을 허문다. 뾰족한 날을 세우고 속 좁게 마음을 닫아버렸으니 조금 무디어도 좋았으련만, 서운하다고 함구해 버렸다. 친구와 무슨 생존경쟁인지 씁쓸하다. 떨어진 단추도 달고 해진 곳도 깁듯이 수선하련다. 꼭 만나자며 전화기 너머 들뜬 목소리에 내가 먼저 전화 걸길 잘했다. 가벼워진 마음엔 오직 친구가 정해준 날짜만이 새겨진다.

지나고 나면 사소한 일들이건만 때로는 허우적거리다 궤도 이탈을 하게 된다. 관계 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실수하는 순간이 아직껏 남아있음이다. 매사에 탄탄대로는 꿈일 뿐이지 않은가. 귀에 익은 평범이 비범이라는 말을 남에게는 조언하면서 정작, 나는 옳다고 고집하며 남의 처한 상황은 뒷전이었음을 성찰한다. 사람살이의 풍경이 아름다워지기까지는 제 몫만큼 겪어 냈을 때, 연륜이 쌓여서 도달하는 것이다.

돌담은 큰 돌을 밑돌로 놓고 그 위에 돌을 포개면서 쌓는다. 서로 조율하여 이가 맞는 부분을 찾아서 놓아준다. 튀어나와 아귀가 맞지 않으면 망치와 정으로 다듬어 주고 틈새에는 잔돌을 끼워 넣어서 무너지지 않게 보완한다. 밑돌은 납작하게 누워 버티고 있다. 식솔을 거느린 아버지처럼 쌓아 놓은 돌의 무게에 짓눌려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다. 나를 딛고 잘 버티라는 자세다.

아버지는 '나는 괜찮다.’고 늘 포커페이스를 하고 계셨다. 무더운 날 두꺼운 옷을 훌훌 벗어 버리듯 모든 일을 거뜬히 처리하곤 했다. 마음 한 자락도 흔들림이 없는 줄 알았다. 가끔 마당 한 편에서 담배 연기가 사라지는 허공을 응시하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짐작건대, 풀리지 않은 일로 내색도 못 하고 속울음을 삼키셨을 듯하다. 그때는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는데, 말씀 한마디만이라도 건네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이 엉켜서 아직껏 가슴이 아리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천륜이 남긴 그리움이나 아픔을 녹여내기엔 그저 끌어안고 살 뿐이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나 역시 허공에 시선이 닿는 날, 아버지의 존재는 가슴에 밑돌로 다져져 자리해 있다.

밖은 다정한 바람 소리는 아니지만, 햇살을 동반하고 산책을 나선다. 바닷가에 돌로 쌓아 놓은 봉수대에서는 멀리까지 시야가 닿아 낯선 존재의 접근을 쉽게 발견했으리라. 해녀들의 젖은 몸을 녹이고, 시퍼런 물길마저도 데워 버리는 돌로 둘러놓은 불턱도 만난다. 돌담의 여러 형태가 곳곳에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

눈앞에 돌담길이 들어와서 파도 소리마저도 귓전에서 흘려버린다. 돌담길은 어느 타국에서든 고향을 소환하고 모천으로 회귀하게 하는 노스탤지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땐 어디를 서성이는 것보다 이곳이 마음 붙들기에 좋다. 돌담길은 마치 유년 시절 스케치북에 색종이 찢어서 붙여 놓던 모자이크 같다. 유유자적 느린 걸음으로 흐느적거리는 건 길의 끝자락에 금방 당도할까 아쉬워서다.

밭 주인이 내어놓았는지 길 어귀에 무 두어 개, 듬성듬성 썰어 넣고 고등어조림이나 하려고 주워 온다. 돌담길을 걷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남겨둔 무를 햇볕에 시들지 말라고 돌담 아래 응달로 옮겨 놓는다. 이 마음 아무도 몰라도 시린 겨울을 녹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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