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36)_오인 수필가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을 본다. 야밤중에 등불을 비춰 든 젊은 선비가 담 모퉁이에서 쓰개치마 쓴 여인을 만나고 있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 남에게 들킬세라 빨리 자리를 뜨려는 남녀가 애틋하다. 서로 헤어지기 아쉬운 그 마음이 전해지며 나의 연애 시절이 자박자박 걸어온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만났다. 학교에서 그를 만나면 서로 눈빛만 주고받는다. 같은 한 공간에서 말 건네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는 나를 조용히 바라볼 뿐 말도 잘 걸지 않는다. 어쩌다 회식 자리가 있는 날이면 뜬금없이 “애인 있어요?” 물으며 슬쩍 딴청을 피운다. 그의 말에 옆에 계시던 선생님들도 약속이나 한 듯 덩달아 입방아를 찧는다.


“멀리서 찾지 말앙, 처녀총각 끼리 잘들 해봐.”

갑자기 나는 화젯거리의 안주가 되고 만다. ‘내 이상형도 아닌데 왜 이러지?’ 오래 앉아 있기가 민망하다. 제주시로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나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는 키도 크지 않고 체격도 작다. 반쪽짜리 눈썹과 얇은 입술에 호남형도 아니다. 다만 다리를 꼬고 소주 한 잔을 두세 번에 나누어 찔끔찔끔 마시는 모습이 남달리 멋있을 뿐이다. 농담도 할 줄 모르고 크게 소리 내어 웃지도 않는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 못한 마음을 전하는 듯 능청스럽게 밥 좀 달라며 집에 오기도 하고, 술 한잔 걸친 날이면 한껏 높인 목청으로 <그 집 앞>을 부르며 내 집을 지나친다.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K 선생님이 언니 좋아하고 있구나.”하고 묻는다. “아니야.” 그의 행동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흔들리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쓸쓸히 걸어가고 있는 그를 생각하니 애처롭게 느껴진다. 어쩌면 뛰쳐나가 그와 함께 걷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거의 매일 똑같은 바지와 셔츠차림으로 출근한다. 돈이 없어 담배 한 개비를 빌려 피우기도 하고, 숫자에 어두워 다른 선생님보다 일 처리가 느리다. 그럴 때면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되고 누이가 되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민의 정(情)이 싹트고, 차츰 내 가슴에 그가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읽고 있던 법정의 『서 있는 사람들』 책갈피 속에 “서귀포 초원다방에서 봐요.”라는 쪽지가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렌다. 버스 타고 자주 다니던 화순에서 서귀포로 가는 길이 새롭게 느껴진다. 창문 너머 그림 같은 풍경이 아름답다.  

찻집에 들어서니 그는 벌써 와 있다. 나를 보더니 작디작은 눈은 떨고 바짝 마른 입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비비 꼰다. 어색하게 커피와 홍차를 주문하고 말없이 마신다. 차 한 잔을 반쯤 마시더니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한다. 택시를 타고 간 곳이 바닷가 ‘소라의 성’이다. 

오솔길 대숲 사이로 숨어 들어오는 바람이 몸을 비비며 빗질을 한다. 나는 그를 따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몇 발자국 내려가다 갑자기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서며 손을 살포시 붙잡더니 “우리 1년 후에 결혼하자.”하고 말을 뱉는다. 그리고선 그는 아무 말이 없는 내게 양팔로 어깨를 감싼다. 사랑 고백을 하면서 무릎도 끓지 않고 꽃도 반지도 없다. 어둠이 내린 바다의 별빛과 파도만이 출렁거리며 축복할 뿐이다. 

뜻밖의 청혼에 나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함께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없어도 무엇을 먹든 어디에 살든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내게서 제대로 사랑을 훔쳐냈다. 

그날 이후 ‘사랑의 콩깍지’가 씌워지고 약속은 지켜졌다.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서야 사랑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이켜보니 고통과 기쁨이 밀물과 썰물처럼 겹쳐지며 살아 온 기적 같은 삶이었다. 

얼마 전 서귀포 ‘소라의 성’을 다시 찾았다. 음식점은 사라지고 2층에는 북카페가 있다. 발코니에 서니 솔향을 몰고 온 바람이 코끝에 와 닿는다. 파도는 하얀 거품을 내며 옥빛 비단으로 바다에 풀어놓고 있다. 그날의 잔잔한 감동이 밀려와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주름진 얼굴 뒤로 흘러내린 흰 머리카락과 거친 손마디가 애잔하다. 

한 잔의 물도 스치는 댓잎 바람도 소중하게 느끼는 나이가 된 그와 내가 그때 그날의 약속과 다시 마주한다. 폭포 물소리가 오페라처럼 웅장하게 들리는 이 성에서 그와 나는 한 잔의 차로 축배를 든다. 저 수평선을 넘어가는 순간까지 뜨겁게 사랑하며 영글어 가자고 되뇐다. 두 손을 잡고 나오는 길이 더욱 푸르다. 페츄라 클락의‘ 당신에게 바치는 나의 노래’를 듣는다. 당신의 사랑 없이는 단 하루도 없습니다. So, love, this is my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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