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37)_고혜자 수필가

발이 푹푹 들어갈 정도로 흰 눈이 두텁게 쌓인 크리스마스이브, 작은 발자국과 큰 발자국이 마을 복지회관 방향을 향해있다. 마을 도서관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참여하는 큰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김치 만들기 행사. 으레 김장은 각자의 집안에서 자신들 몫의 김치를 담그지만, 이번만은 동네 아이들이 동네 어르신들을 위해 김장을 하기로 했다. 애들이 직접 김치를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 뵙고 전달하는 이 행사의 시작은 동네 주민이 흔쾌히 후원해 준 10 콘테나 정도의 무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치 속은 전날 어른들이 미리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은 가장 작은 사이즈의 고무장갑도 헐거워 면장갑을 먼저 끼고 그 위로 고무장갑을 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고무줄까지 팔에 끼워 넣어 흘러내리지 못하게 했다. 또한 모든 음식은 청결이 우선이기에 야무지게 머리에 망을 씌웠다. 치열한 김장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이의 옷을 보고 보호자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우비의 단추가 등으로 가게 입혀 꼼꼼히 단추를 잠갔다. 그 모습은 마치 수술에 들어가는 의사처럼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신발에 덧신까지 씌우면 드디어 완성!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작은 김치부대가 각자의 자리로 이동하면 그들의 옆에 붙은 숙련된 조교들은 검지를 들어 저기 소가 덜 발렸다, 여기 골고루 묻혀라하고 말하고 아이들은 작은 열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며 자신의 머리통보다 큰 배추를 열심히 조물딱 거린다.

이날 최고의 김치 장인상은 7세 지모 군에게 돌아갔다. 소를 한번 묻히고 한입 찢어 먹어보고를 수십 번 반복하던 그는 종래에 얼굴 전체가 김치 범벅이 된 채였다. 열정적인 김장이 끝나고 나서는 통에 김치를 옮겨 담았다. 100통 정도가 나왔다.

다음 단계는 통 위에 붙일 사랑의 메시지를 작성하는 것이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스티커를 받은 아이들은 다채로운 사인펜으로 꼬물꼬물 편지를 적었다. 자신의 개성이 듬뿍 묻어난 짧은 메시지들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움에 웃음이 나왔는데 가령 김치를 전달받을 어르신은 자신보다 김치를 수백 그릇은 더 먹었을 테지만 맛있게 먹는 법. 밥에 김치 말아서 먹는다. 김밥도 같이 먹는다.”와 같은 자신만의 특별한 김치 맛있는 방법을 적고, 전달받을 어르신이 혹시나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 할까봐 또는 이 김치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자랑하듯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그 아래에 000딸이라고 자신의 아버지 이름까지 세심하게 적어넣어 어르신이 자신을 모를 수도 있을 상황을 예방했다. 아직 글쓰기가 익숙지 않은 저학년 친구들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마시게 드세요 사랑해요.”라는 귀여운 문장을 정성스럽게 적고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 살아 가세요라는 오타인지 진심인지 경계가 애매하여 더 마음을 울리는 편지를 작성했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유치부 친구들은 무지개빛 김치를 그리고, 커다란 하트를 색칠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제각각의 메시지에는 애정과 뿌듯함이라는 공통적인 감정이 듬뿍 묻어있었다.

오후 1시쯤 수고한 아이들이 어른들이 맛있게 삶은 탱글한 보쌈과 직접 만든 새 김치를 먹었다. 먹는 내내 아이들은 아직 김장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자신의 김치가 어떤 분께 갈지 아이들은 궁금해하고 기대하면서 자기들끼리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어찌 보면 김치를 만든 여섯 살 어린이부터 김치를 받는 백 세의 노인까지 참여한 이 프로그램은 도서관의 소셜믹스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 사례이다. 몸은 힘들지만 1세기를 통과하는 프로그램에 주민 전체가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모습은 발효가 되는 김치처럼 애정과 노력으로 발효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이들도 김치를 받는 어른들도 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사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걱정했는데 끝나 갈 즈음에는 익어가는 김치가 기다려지는 따뜻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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