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직의 음악칼럼

2000년대 초반이었으니 한 20년은 족히 된 것 같다. 

친구들이 한라산을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는데, 마침 겨울 산행이었다. 어리목으로 향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설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나와는 사뭇 다름을 느꼈다. 등산복, 등산화, 지팡이 등 온갖 등산 장비로 장착해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겨울 산행은 처음이라 뭣도 모르고, 나름 두터운 파카에 운동화를 신고 가볍게 나갔는데, 뭔가 잘못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괜찮다는 친구들의 속임수에 일단 출발은 하였으나 가파른 구간을 만나면서 고난의 시간은 시작됐다. 어찌어찌 윗세오름까지 올라갔고, 라면 하나 먹고 내려오면서 ‘도착하자마자 바로 등산 장비를 사야겠다’라고 단단히 벼렸다. 

내려오자마자 0마트로 달려가 나름 고가?의 장비를 구입했지만 이후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쓰고는 창고에 고이 모셔두었다. 무려 10년은 된 것 같다. 모셔둔 게. 이후 언젠가 다시 산행을 가보려고 꺼냈는데 이런! 모두 삭아 쓸 수 없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들여놓을 때 잘 씻었으면 괜찮았으려나’라는 생각을 살짝 했지만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이 고가?의 등산 장비는 제 임무를 거의 수행하지 못한 채 낡아 쓸모없게 된 것이다. 어두운 창고에서 그 긴 시간을 의미 없이 잠만 자다 생을 마감한 꼴이다.

언젠가 주방에서 가위로 고기를 자르는 데 그만 가위 손잡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순간 필자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 가위는 참! 수고했다.’ 주인이 하라고 하면 뭐든지 말없이 해냈다. 고기를 자르라 하면 고기를 자르고, 김치를 자르라고 하면 김치를 자르고, 종이를 자르라고 하면 종이를 자르고 등을 반복하다 이제는 수명이 다 되어 부러지고 만 것이다. 별거 아닌 한낱 가위에 지나지 않지만 많은 사람에게 큰 이로움을 주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다 장렬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참! 수고했다.’ 그리고 새 가위가 들어오는 즐거움도 주었다.

전화가 왔다. “아빠! 선물 보냈으니 잘 받아!” 한 2주 정도 있으니 레코드 플레어가 집에 도착했다.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들어야 하는데 플레이어가 없어 못 듣는다는 아빠의 투정을 딸이 기억했다가 생일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자연스레 창고 어딘가에 있을 오래된 낡은 레코드판이 생각났다. 4~50년대 녹음된 모노 레코드판 들이다. 카루소, 베냐미노 질리, 스키파, 스테파노 등 전설적인 명 테너들의 소리를 품은 오래된 레코드판, 잡음 소리를 동반한 감성 있는 레코드판 들이다. 그 레코드판들은 지금도 시골집 창고에 있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수십 번은 딸이 보내준 플레이어 위에 올려놓고 들었다. 빨간색 레코드판도 있고, 긁힌 자국이 선명한 레코드판도 있고, 재킷이 너덜너덜한 레코드판도 있다. 하지만 이 레코드판들은 지금의 어떤 음원들보다 깊고, 따뜻하고, 정감이 있고, 감성적이다. 

바로 녹음 현장에 있는 느낌을 준다. 필자가 음악 공부를 처음 시작했던 시절로 인도한다. 처음의 마음을 떠 올려준다. 당시 같이 공부했던 동무들을 생각나게 한다. 전화 한 통 하고 싶다.

이렇게 보면 낡음에도 격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 낡아진 것들은 그저 쓰레기통에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제 역할을 충실히 하다 낡아 수명이 다한 것들의 그 수고로움은 감사를 동반하며 또한, 새로움에 대한 기대마저 준다. 또한, 레코드판처럼 역사를 동반한 그 낡음은 그냥 낡음이 아니라 처음을 생각나게 하고 잊혀진 가치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 움직인다. 

그러고 보면 낡음은 슬픔이나 아쉬움이 아니라 그 노고에 대한 감사이며 새로움에 대한 희망이며 잊혀진 가치의 되살림이다.  

오승직 지휘자 /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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