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38)_윤행순 수필가

고향은 화수분이다. 들었던 얘기 천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 집에는 누가 살며 지붕 색깔은 어땠는지, 저 집에는 식구가 몇이었는지. 누구네 엄마는 이팝나무 꽃을 피워내듯 한 사발 가득 다디단 간식을 만들어 주었고, 또 누구는 술도가 하는 친구 집에 몰래 들어가 술을 마시고 삿대질하다 나자빠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영화의 파노라마 필름처럼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김범 작가의 <바위가 되는 법>을 관람하기 위해 미술관에 들렀다. 보는 것이 보는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된 작품을 둘러 보면서 붓방아로 밤을 지새웠을 작가의 예술혼 앞에서 숙연해진다

아티스트북이 전시된 공간에 이르렀을 때 <고향>을 만나게 되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생채기 같은 물음이 서울까지 따라와 또 내게 묻고 있다. ‘가을엔 시내 계곡에 형형색색의 단풍잎이 떠내려가고 당신의 그 곁에 소꿉친구와 앉아 그 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까라는 질문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전시된 글을 읽어 내리며 이제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연연한 말들을 그려보며 울컥했다. 한 번쯤 고향을 가진 사람이 되어 고향 이야기를 진종일 하고 싶었다.

꾹꾹 눌러두기만 했던 고향 무두질이 시작된 것은 아마 그때쯤이었을 게다. 우리 집에서 몇 발짝만 걸어가면 되는 곳에 우물이 있어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게 내 고향의 뿌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저녁 무렵, 마당에서 혼자 놀다 지치면 풀 먹인 하얀 모시 저고리에 연한 갈색 일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수건까지 둘러 샘물가로 달려갔다. 몸집이 작아서 되레 옷이 나를 담아 놓은 마대처럼 헐렁해 보였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옷을 입을 때의 두근거림, 아마 그것은 지금까지도 느껴본 적이 없는 황홀함이었다. 샘터에는 하루 일을 끝낸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할 말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속에 담아 둔 것을 물처럼 와르르 쏟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속으로 두레박을 던지고 길어 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빈 물허벅이 가득 채워졌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하얀 물거품은 내 얼굴에도 튀어 짭조름한 물맛이 스며들었다. 가족의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기쯤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더듬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몇 날 며칠 동안 같은 사람이 가겟방 앞을 서성이는 행동이 이상했던지 머리가 허연 노인이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우물이 있던 곳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그 우물은자네가 서 있는 거기 발아래야

모두 떠나버린 어느 집 딸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노인은 우수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더는 볼 수 없었던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브로카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대로 묻어두는 게 속 편하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것이었을까.

발을 내려다보았다. 레미콘은 설사병이 도진 것처럼 줄줄 시멘트를 쏟아내고는 우물을 덮어 버렸다. 더하여 그 위로 길까지 만들어 버렸다.

어릴 때 추억까지 묻어버린 이곳은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낯설었고, 부모님이 모두 떠난 고향은 적막강산처럼 느껴졌다. 춤을 추는 반딧불이를 보며 집으로 돌아가던 저녁도, 박 넝쿨에 박이 조롱조롱 달린 초가지붕에 올라갔던 일도 아주 오래전 보았던 한 폭의 희미한 그림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를 물을 때, 고향이 필요한 사람에게 책을 권해 드린다라는 아티스트북이 진열된 곳에서 또 하나의 화수분을 꿈꾸어 본다.

물도 의식이 있어 들어 올리고, 퍼붓고, 쏟아내며 놀았던 용천수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역류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대로 놔두고 물처럼 앞으로, 앞으로 흘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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