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칼럼_이지영 (환상숲곶자왈 부대표 / '숲스러운사이' 저자)

3월은 설렌다. 개학, , 새 학기란 단어들과 함께 새싹 움트듯 새로운 시작을 해보자며 마음을 다잡게 된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새해가 저만치 흘러가 버렸다. 1월에 했던 다짐들이 지키지 못하는 후회로 변해 갈 즈음, 우리는 고맙게도 3월을 마주하게 된다. 참 신기하다. 3월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태까지는 겨울이지 않았냐며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이하는 새해가 1월이라면, 새롭게 시작해 보는 출발점 같은 새날은 3월이다. 나 또한 올해는 꾸준히 글을 써보자 했던 마음을 3월에야 끄집어낸다.

나는 곶자왈 해설가이다. 입말로 살아가다 보니 내가 봐도 글이 엉성할 때가 많다. 가끔 끄적이던 일기들을 엮어 엉겁결에 책도 냈다지만, 글밥을 먹어온 이가 아니라는 부분들이 글 사이사이 비죽이 보여 부끄럽기만 하다. 그런 나에게 서귀포신문사에서 집필 제안이 들어왔을 때, 즐거운 마음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부터라도 많이 써보고 닦아나가라는 뜻인가 보다싶어졌다. 3월을 앞두고 있어 나올 수 있는 용기였다.

어떠한 내용으로 글을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지혜를 얻고자, 숲을 방문하신 분들께도 봄을 맞이하는 마음을 넌지시 물었다. 당연히 시작을 떠올리는 나에게 정리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는 답이 날아왔다. 당신께서는 평생을 선생님으로 살아왔고, 며칠 전 퇴직을 하셨단다. 남편과 함께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며 올레길도 걷고 곶자왈 숲도 걸으며 해보지 못했던 일들로 채워가고 있는데, 2월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퇴직이 3월이 되면 실감이 날 것 같다며 눈물을 찍어내셨다.

숲이라는 공간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자연은 늘 그렇다. 모르는 사람과도 한참을 대화할 수 있게 하고, 숨겨두었던 감정도 살짝 내비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았는데, 정작 내려놓으려니 나를 위해서는 해 놓은 게 없는 것만 같다. 주변에 많던 인간관계도 일과 떼어 놓고 보니 남아있지가 않다. 그다음 발자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쌓아둔 것 같지도 않은 이 상황에서 콧대 높았던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인정할 시간이 필요하단다. 바람이 한차례 훅 불자 시린 공기에 달려있던 꽃향기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그 말을 묻기 직전, 내가 제주백서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게 후회됐다.

추운 계절에 피는 꽃들은 향기가 진하다. 수정을 도와줄 벌, 나비가 적은 시기이기에 자신을 알리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다. 향이 천리까지 간다 해서 천리향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똑같이 꽃이 폈음에도 향이 나지 않는 꽃들을 찾아보았다. 이미 시집을 간 꽃은 옆 친구 결혼을 보내야 하기에 향기를 숨겼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분께 옆에 든든한 남편이 있으신데 이렇게 아름답게 하고 다니시면 꽃들 사이에서는 의리가 없는 거예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다. 그때 그분이 이미 져버린 꽃은 버둥대도 어쩔 수 없더라.”며 손사래를 쳤는데, 그 말이 뒤늦게야 마음을 찔렀다.

찍어내던 눈물이 묶어두었던 마음 터져버린 것 마냥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조언하거나 위로를 건네서는 안 된다. 그저 고요히 들어주는 것만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아무 말 없이 따스한 눈빛을 건넸다. 예닐곱 사람이 둘러앉은 그 공간에 온기가 채워졌다. 그 허전한 마음을 미리 겪어보았을 남편분께서 꽃이 시들었어도, 꽃은 꽃이야.”라고 넌지시 예쁜 말을 건네주셨다. 여자 선생님께서는 실컷 울고 나서는 멋쩍었는지 빨개진 코와 눈을 비비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어 주셨다.

정리하는 시간이라 하셨는데, 3월은 시작이 맞다. 끝이라고 생각될 때가 다시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모든 꽃이 열매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기에, 열매가 맺는 것은 분명하다. 지는 꽃 또한 아름다운 이유이다. 꽃이 진 자리에야 비로소 열매가 맺는다는데, 아름다웠던 그분들의 열매 맺는 삶을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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