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39) _ 정영자 서귀포문인협회 회장

한 계절이 지나가고, 문득 고개를 들면 눈앞에 당도해 있는 것이 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내 가까이 있었고 더러는 아쉬운 흔적으로 남아있는 풍경이다. 해마다 이때 봐왔던 들판의 작은 들꽃들, 툭 툭 떨어져 누운 붉은 동백의 슬픈 그늘, 가지 끝에 움트는 목련이며 매화, 벚꽃의 꽃눈들이 세월의 음계를 그린다.  

마음이 들뜬다. 

설핏 기울어 가는 여름 해를 등지고 걷던 골목길, 가을 색으로 물드는 나무 그늘에서 나누던 이야기들, 억새 핀 들길에서 맞았던 늦가을의 고요한 풍요 속에서 돌아보던 우리가 살아온 날들. 다시 꽃씨를 감춘 채 바람으로 먼저 온 봄.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다시 맞으면서 문득 세월의 결을 느낄 때, 나는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닦는다. 

현관에 붙박이로 놓여있는 신발장은 집의 구조에 적당한데, 그 안에 신발은 공간이 넘칠 정도다. 그만큼 바삐 살았다는 거라면 위안이 되는 숫자지만 회의감은 늘 따라다닌다. 최선의 삶이냐고 스스로 묻는 물음이 되면 나는 답 내기를 주저한다.

사계절을 누비고 다녔던 구두와 운동화, 샌들과 등산화와 부츠를 꺼낸다. 신발 속 먼지를 털어내고 가죽 표면에 묻은 때 자국을 닦고 신발 밑창을 닦는다. 내 생활을 적어놓은 듯 닳아버린 구두 뒤축에는 지나온 시간의 징표인 양 신발마다 남은 흔적이 다르다. 때로는 먹고 살기 위해 모질었던 삶이 응축돼 있을 것이다.

눈에 익숙하지만, 한동안 잊었던 구두 한 켤레가 크게 다가온다. 제일 위 칸에 남겨두었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의 구두다. 

구두를 꺼내 보는 네 번째 봄이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한동안 그의 체취가 묻은 것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물건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스스로 반문하던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써넣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변했다.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는 내 의식이 결정하는 것이고, 누군가가 사용할 때 그 물건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긴 세월 함께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한다는 건 또 한 번의 이별을 의미했다. 다 버리기로 마음먹기까지 나의 갈등은 그에 대한 미련이었으나,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버리자는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시간은 그를 향한 애도였다. 고여있던 슬픔은 남몰래 훔치는 눈물로 솟아오른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냐고 묻던 반백의 남자. 이 아침에 그가 신던 구두를 다시 닦으며 그를 위해 깨어있던 날들을 소환한다. 먼지를 털고 손수건을 챙기고 말끔히 닦은 구두를 내놓고 그를 배웅하던 아침.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던 그의 등이 아직 내 시야에 어른거리지만, 그가 열고 나가던 묵중한 문은 무심히 경계를 가로막는다. 

구두에 묻은 먼지를 솔로 털어내며 한쪽으로만 닳은 구두 뒤축을 다시 본다. 그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정리하면서도 이 뒤축이 시종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쪽으로만 닳아버린 구두 뒤축에는 장남으로 태어난 가장의 무게가,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실려있다.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떠난 그 사랑을 이 봄에 다시 들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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