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훈 / 서귀포시 중앙동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장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아마도 2000년도 초반 유명 브랜드 카메라 광고 카피였을 것이다. 지금도 회자될 만큼 당시의 강렬했던 카피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꺼내들었던 기억이 있다.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스마트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을 뿐 옛날처럼 기억하지 않는다. 기록과 기억은 모두 과거의 일을 보존하고 되새기는 방식으로 유사하지만 그 성격과 방식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다.
‘기록’의 사전적 의미는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다는 뜻이다. 즉 사실이나 생각, 사건 등을 글, 사진, 영상, 음성 등 외부 매체에 남긴 것이다. 객관적이고 물리적 형태로 존재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도록 정보를 보존하고 전달도 가능하다.
누구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 확인 가능한 대신에 당시 기록하는 사람의 시선이나 의도에 따라 선택과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란 유명한 말이 있듯이 승리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정리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다시 생각해 낸다는 뜻이다. 경험이나 정보를 개인의 뇌에 저장하고 떠올리는 능력이다.
기록과는 달리 주관적, 비물질적인 형태이며 심리적ㆍ감성적 작용을 포함한다. 감정과 관점, 시간에 따라 변형될 수 있으며 개인적 의미와 감정을 담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왜곡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특징이다.
인류 최초의 기록은 해석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지만 기원전 3000~ 4000년 수메르인의 설형문자로 현재 이라크 남부 지역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대펜으로 새긴 쐐기 모양으로 곡물의 수량, 소유자의 이름, 거래 내역, 세금 등 초기 기록의 대부분은 경제 활동과 관련된 것이다. 그 이전 선사시대에도 동굴 벽화 등 암각화가 있었지만 문자라기 보다는 사냥 장면, 동물 그림의 예술적·주술적 표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기록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으며 그 가치는 중요하다.
최근 4ㆍ3기록물 1만4673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제주의 역사를 넘어 기록문화의 가치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4ㆍ3기록물이 인류가 보존해야 할 가치있는 기록인지가 중요한 심사 요건이었고 그 점을 인정받은 점이 제주 역사를 넘어 세계의 역사로 인정받은 셈이다.
과거의 아픔과 미래를 위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전 세계가 함께 하기로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기록유산이 되기 위한 등재기준과 여러 과정의 절차를 거쳐야하니 매우 까다롭고 어렵다.
서귀포시 중앙동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도 옛 중앙동 사진 및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동명백화점을 중심으로 중앙동 등 옛 서귀동 사진이 대상이다. 사진이나 자료를 제보받아 디지털화를 통해 마을앨범을 제작하고 중앙동을 포함한 서귀포 원도심 생활사를 전해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아 구술 영상을 제작해보고자 한다.
지난 상반기에는 시민 아키비스트 양성 교육 과정을 통해 10여명이 수료하기도 했다.
지금 어르신의 기억은 아이의 기억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은 그 기억을 꺼내어 사진, 영상, 책, 디지털 매체 등으로 기록해 전달하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어르신의 기억과 기록을 미래세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카이브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서랍, 장롱, 책장, 창고 속에 숨어있는 옛 사진이나 기억을 세상 밖으로 꺼내야 하는 이유다.
흩어진 옛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해야 하는 시대다. 새로운 미래콘텐츠 역시 과거의 기억과 기록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억을 공유하면 공동체는 계속 유지하기가 수월하고 끈끈해진다. 거기에 새로운 인구가 들어와 지역소멸을 함께 대응하는 것. 과연 그 시작은 개인의 기억과 기록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다.
서랍 속 낡은 사진과 자료를 꺼내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