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예술가의 집을 찾아서④]홍성석의 선흘작업실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집은 사람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그릇일 터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숨을 받고 많은 인연들 속에서 자라고 나이를 먹어가고 무수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아온 집. 하물며 예술가의 집이랴.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끝없이 영혼을 담금질하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예술가의 집이 지닌 숙명이 아닐는지. 그래서인지 예술가의 집은 거기에 깃들어 사는 예술가와 그가 매번 엄청난 산통(産痛) 끝에 세상에 내놓는 작품들과 꼭 닮아있다. 


 바다와 오름과 돌담이 하나로 어우러진 제주 곳곳에는 예술가의 집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들여다보고 싶어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궁금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갈 수 없는 예술가의 집들을 순례하는 여정은 아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듯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숨결과 더불어 늘 깨어있는 예술혼을 더듬어보는 기회가 될 듯도 하다.      <편집자 주>

  

▲ 부조작품이 문패처럼 걸려 있어 한 눈에 예술가의 집임을 알게 한다.
이상하다. 선흘은 예술인 마을도 아니면서 예술가를 여럿 품고 있는 마을이다. 안개 심하고 바람 세고 눈 많이 오고 습하디 습한 땅 선흘의 어느 구석에 홀려 예술가들은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일까?

아마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일찍 이곳에 집을 짓고 작업실을 연 이가 바로 서양화가 홍성석(49)화백일 것이다. 제주시 도두에서 나고 자란 홍화백이 제주 동쪽 중산간에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도두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서쪽 동네에 둥지를 트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데 홍화백은 어인 까닭으로 선흘을 찾았을까?

“한번 놀러왔다가 마음에 들어버렸어요. 아담하고 아름다운 선인분교가 좋아서 우연히 들른 길이었는데 마침 땅이 있다고 해서 덜컥 산 거지요.”

잔디가 깔린 운동장이 어여쁘기만 한 함덕초교 선인분교를 두고 오른편으로 꺽어 500m 지점쯤에 위치한 땅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저렇게 집을 짓고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깊은 생각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도시를 떠나기로 작심을 하고 이 터에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순전히 홍화백의 말대로라면 ‘빨리 지을 수 있고 돈이 적게 드는’ 조립식주택을 선택했다. 지금이야 곳곳에 목가풍의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초록색 지붕을 인 2층짜리 조립식 주택은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집이었다.

집 입구에 요즘 작업중인 주제의 부조 작품이 걸려있다는 설명대로 올레가 시작하는 지점에 하나, 끝나는 지점인 바로 집 앞에 하나 두 작품이 걸려있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 눈부셨던 흰색 판넬은 다소 퇴색했지만 올레 담벼락에 정갈하게 내걸린 작품 덕분에 예술가의 집은 아직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집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1층 입구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실이 나타난다. 서로 자주 만나지 말아야 할 사이나 되는 것처럼 아예 출입구부터 갈라놓은 모양새이다. 1층은 네 식구가 사는 살림집이고 2층은 전체가 작업실이다. 2층 작업실은 처음 지을 때부터 아예 천정을 높이 올리고 앞쪽에 베란다를 두어 탁 트인 중산간 마을의 자연을 실내공간으로 끌어들이도록 했다.

▲ 2층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작업실 내부.
바닷가서 나고 자라...한갓진 중산간서 작업
 주변 공사 늘어, 자연 깊숙이 들어가고파

도두는 일단 도시적인 분위기지요. 이곳으로 옮기기 전에 작업실이 이호에 있었는데 그곳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런데 이곳은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마치 자연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2층 베란다에 서면 빙 둘러 오름들이 보이고 더덕이며 도라지며 콩을 심는 널따란 밭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저절로 가슴이 좍 펴져 연달아 심호흡을 하게 된다. 지금처럼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기 전,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베란다에 서면 사방에 막을 둘러친 듯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는 정말 장관이었다고.

최근 주변에 공사가 이어지면서 중산간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홍화백. 그렇게 지금보다 더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공간으로 옮기게 된다면 그때는 나무와 흙과 돌 등으로 직접 집을 짓고 싶은 꿈이 그에겐 있다.

홍화백에게 있어 선흘 작업실은 단순한 작업공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1993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로 2003년 이곳에 자리 잡기 전까지를 전기, 그 이후를 후기로 나눈다면 두 시기의 작품경향은 경이에 가깝도록 판이하기 때문이다. 인체작업을 통한 인간성 상실의 시대와 인간 존재에 대한 내면적 독백이 전기의 작풍이라면 후기에 해당하는 요즘 그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제주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둠이 내려앉은 모노톤의 X선 사진 같기도 하고, 마치 오랜 시간 단련된 보디빌더의 울퉁불퉁한 근육을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것 같기도 한 <비생명적 문화에 대한 小考>시리즈에는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이 표현되어 있다. 인체들에는 하나같이 긴 자릿수의 일련번호가 찍혀있다, 마치 바코드처럼. 그렇게 物化되어가고 있는 우리 존재 스스로를 자각해야만 하는 까닭에 그림은 자칫 난해하게 다가오고 그림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를 다 수용하기에는 버겁기 짝이 없다.

 제주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선흘시대’ 열어
 “탐라별곡 통해 인간과 자연 합일 보여줄 터”

그에 비하면 지난해 개인전을 열기도 했던 <탐라별곡>시리즈는 그지없이 친숙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온다. 오래 된 사찰의 창호에 새겨진 꽃무늬를 닮은 꽃송이들이 이리저리 뻗어나는 가지 위에서 일제히 피어나고 그 사이사이 백록담이 보이는가 하면 산방산이 있고 일출봉이 솟아있고 그것들 사이로 노루가 뛰놀고 비행기가 날고 제주 조랑말이 힘차게 달린다. 언뜻 보면 색색의 비단실로 섬세하게 수놓은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보면 빛나는 자개조각으로 빚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화려하나 튀지 않고 제각각인 것 같으나 하나로 이어진 생명의 나무가 바로 <탐라별곡>이다.

▲ '탐라별곡' 시리즈 서양화가 홍성석씨
“인체작업을 했을 때나 현재나 근본적인 생명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체작업에 몰두할 당시는 시대 상황 자체가 인간의 실존문제에 천착하게 했고 비인간화, 물질주의 등에 주목하게 했었지요. 그 시기를 거쳐 온 지금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세계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내 안에 각인되어 있는 고향 제주의 이미지를 끄집어내서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말하자면 인간의 실존적 고뇌에서 자연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작품 경향의 분기점이 바로 선흘이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홍화백이 바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오름과 들판을 껴안고 작업에 몰두한 ‘선흘시대’는 곧 <탐라별곡>으로 구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선흘시대’가 낳은 <탐라별곡>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편안하다. 무척이나 우아하고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이 나는 혼합재료의 색조 덕분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굳이 숨겨놓지 않고 그림 전면에 물 흐르듯 펼쳐놓은 작가의 친절함 덕분인가.

<탐라별곡> 시리즈는 회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조작품으로 발표되기도 했고 현재 입체작품으로도 구상 중에 있다. 문패처럼 그의 집 올레에 걸린 부조작품을 보니 일상적인 거리나 공간을 예술적으로 탈바꿈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홍화백은 지난해 제주시 건입동 공공미술작업에 부조작품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8일부터 2주간 제주시 현인갤러리에서 개인전 <나의 정원, 자라는 숲>을 열 예정인 홍화백. 그가 ‘선흘시대’를 마감하고 더 자연 깊숙이 들어가 흙과 나무집을 지을 때쯤이면 그의 정원은 얼마나 더 자라있을 것인가, 그때 우리는 또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 앞에 얼마나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것인가.    (www.seok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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